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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허가 판자촌과 아파트가 공존하는 상계동
ⓒ 이명옥
1989년 결혼해 광주에서 살던 나는 1991년 겨울 어느 날, 눈발마저 오락가락하는 서울 상계동 달동네 길거리에 짐을 한가득 내려놓은 채 10개월 된 아이를 들쳐 업고 시어머니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허가 판자촌에서 혼자 살며 당신 생활비를 벌어 쓰시던 시어머니는 그 좁은 집에 시집간 시누이의 장롱까지 맡아 놓으신 터였고, 책임감 없는 큰아들과 한집 살림을 하게 된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진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나는, "짐만 맡겨 놓고 곧 말레이시아로 일을 하러 가게 될 것"이라던 남편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그래서 짐 하나 풀지 못한 채 무허가 판자촌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그럭저럭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백수생활은 열흘을 넘어 한 달, 두 달 반복되다가 드디어 20개월을 넘어섰고 나의 인내력도 바닥이 나버렸다. 나는 '이혼'이란 단어까지 생각했지만, 내 발목을 잡은 건 역시 한 살 난 어린 아들이었다. 아이를 떼어놓지 못해 수없이 고민했고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다닌 끝에 결심을 했다. 아이를 데리고 악착같이 한 번 살아보자고.

당시 내 나이는 36살. 돌이 겨우 지난 아이 엄마에다가 전문지식도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사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겠다는 것은 오기였을 뿐이었다. 단 한 번도 고된 일을 해 본 적 없던 난, 반나절 동안 파출부 일을 하고 일주일을 된통 앓고는 파출부라는 일을 직업목록에서 지워야만 했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서 하는 라디오 부속품 작업, 장갑 실밥 뜯기, 머리띠 만들기 등의 부업은 힘만 들었지 도무지 돈이 되지 않았다. 아이가 아픈데도 보험이 없어 병원 한 번 못 가다가 친정집에 연락해 아이를 살린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사는 게 지옥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내 사정을 알게 된 고등학교 동창이 소개해준 초등학생 과외를 시작으로 나는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다. 첫 출근을 위해 두 살이 채 안 된 아이를 미술학원에 억지로 맡기던 날,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도 서럽게 우는 바람에 그날 점심엔 체하기도 했다. 그래도 난 오전엔 보험회사로 오후엔 속셈학원 강사로 정말 억척스럽게 일에 매달려 살았다.

한 달에 아이에게 들어가던 비용은 약 120만원. 유치원과 부대비용 60만원, 아이 앞으로 저축하는 비용이 60만원이었다. 지닌 것 없고 졸한 배움 탓에 가난에 찌들어 살던 시집 식구들을 보며 가난과 무지를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이에게 무지와 가난만큼은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7년간의 피땀이 IMF로 물거품 되다

▲ 좁은 골목 양쪽으로 8평 무허가 판잣집들이 줄지어 있다.
ⓒ 이명옥
나는 어찌하든 아이를 가르쳐 제 밥벌이를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대출 적금과 이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아이 교육보험, 아이 차세대 저축, 아이 이름으로 목돈 신탁하기 등 닥치는 대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시어머니가 하던 일을 접고 아이를 본격적으로 봐 주셨고 남편도 일을 시작해 연립을 담보로 한 대출 적금과 이자를 착실하게 갚아가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꿈이 점차 현실화되어 간다는 상상만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면서 도무지 피곤한 줄 모르고 힘이 솟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행복에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IMF가 터지기도 전, 건설 계통인 남편 일터에서는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통장에 들어오던 돈이 갑자기 200여만원에서 40여만원으로 줄어들었다. 40만원이면 대출 적금밖에 안 되는 돈이었다.

나도 이미 3년이나 다녔던 보험회사에 한계를 느껴 정리를 했던 참이었고, 속셈학원 강사로 60여만 원을 받는 것이 내 수입의 전부였다. 당시 한 달 생활비는 대출금 55만원을 포함해 약 200여만원. 절반이 마이너스인 생활이 서너 달 이어졌다. 그나마 남편은 IMF가 나기 서너 달 전 또 다시 실업자가 되어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 시장 통에 있던 자그마한 속셈학원도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어 월세와 내 월급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어가고 있었다. 장사를 하는 학부모들이 많아 경기에 먹구름이 드리우자 학원부터 끊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초등학생에게서 학원 월세와 내 월급이 충당되어야 하는데, 원장이 가르치던 중·고등학생의 수업료에서 일부를 충당해야 하는 형편이 되자 나도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나도 먼저 아이의 피아노부터 끊었다. 한참 피아노에 재미를 붙였던 아이가 서운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사교육이 문제가 아니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서 원금이 축나지 않는 저축부터 찾아 쓰기 시작했다.

차세대 저축을 깨고, 아이 이름으로 신탁해 두었던 목돈 300만원을 찾아 썼다. 저축에 이어 연금 보험, 암보험에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던 교육보험까지 한 푼도 남김없이 찾아 쓰고 카드 빚마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세월을 속절없이 견뎌내야만 했다.

단 10개월만에 통장은 고스란히 비었고 아이 앞으로 저축해두고 혼자 즐거워하며 꺼내 보곤 했던 저축과 보험금 2천만 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살도 안 된 아이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의 손에 맡기고 산 7년간의 피땀이 고스란히 물거품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미란 참으로 강한 존재인가 보다. 비록 빚더미만 남겨졌지만 더 이상 내리막길이 없다 생각하니 처음 이혼을 생각했던 때처럼 악착같이 살아보자는 오기가 저절로 생겼다.

나는 몸을 사리지 않고 신문사, 새벽 신문 돌리기, 논술학원 강사, 사무실 청소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내게 너무 무거운 짐이고, IMF때 진 빚은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남들처럼 사교육에 열성인 극성 어미가 되기는커녕, 그렇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가난을 단 하나뿐인 아들아이에게 물려주는 못난 어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IMF라는 폭풍을 맞은 후, 지난 10년간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지만 부양해야 할 80살 노모와 고등학생 아들이 있으니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야 할 판이다. 또 다시 3년 가까이 가장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남편이 어서 정신을 차려 수렁을 함께 헤쳐 나갈 길을 궁리해 보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공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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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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