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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과 다의 환상> 상권
ⓒ 북폴리오
일본 작가 온다 리쿠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즐거운 비명을 지를지도 모를 일이다. 작년 12월 한 달 동안에 무려 다섯 편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네버랜드> <여섯 번째 사요코> <빛의 제국>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그리고 <흑과 다의 환상>이 바로 그 다섯 편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는 꽤 중층적이다. 물론 그녀의 작품은 매 편마다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다. 하지만 해당 작품의 시작점과 결말은 왠지 다른 작품들 속에 숨어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건 어쩌면 작가의 의도일지 모른다. 온다 리쿠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작품 속에 그녀의 이후 작품들의 소재를 여기저기 숨겨두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부의 이야기를 확장시킨 것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이고, 역시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서 살짝 언급한 이야기가 바로 <흑과 다의 환상>이다.

<흑과 다의 환상>의 무대는 일본 남쪽에 있는 야쿠시마 섬이다. 이 섬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인 곳이기도 하다. 이 섬은 바다에서 보면 가운데가 높은 삼각 주먹밥 같은 모습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900m가 넘고, 섬을 한 바퀴 돌면 약 130km가 된다. 강우량이 많은데다가, 아열대식물에서 고산식물까지 다종다양한 식물이 있는 곳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태고의 숲이 남아있는 섬이다.

온다 리쿠가 ‘숲’을 선택한 이유

숲은 매력적인 장소다. 울창한 숲에 들어가서 길을 걷다보면 자신이 숲과 동일시되는 느낌이 생긴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숲에서 느끼는 매력은 사막이나 초원의 매력과는 다른 형태를 가진다. 숲에서는 하늘을 향해 벌리고 선 나무들이 자신을 환영하는 느낌, 숲에 둘러싸여서 자신이 보호받는 느낌 그리고 수많은 초목들이 주는 따뜻한 안정감이 있다.

또 한편으로 숲은 괴담이 많은 장소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수풀과 나무뿐인 숲에서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누구나 겁이 덜컥 생길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살아 움직이는 나무, 숲 깊은 곳에 사는 정체 모를 괴물을 떠올릴지 모른다.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가 숲에서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숲에서는 쉽게 사람들 간의 경계심이 없어지고, 자신의 속내를 보다 가깝게 드러낼 수 있다. 동시에 함께 걷던 사람 중 누군가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장소일수도 있다. 온다 리쿠가 <흑과 다의 환상>의 무대로 숲을 택한 것은 아마도 이런 요인들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섬으로 이제 곧 40살이 되는 남녀 4명이 여행을 온다. 모두 20년 가까이 친구사이로 지내온 사람들이다. 아키히코, 마키오는 남자이고 리에코, 세쓰코는 여자다. 이들은 절친한 사이지만 각기 개성이 있다. 아키히코는 좋은 환경에서 자란 귀공자 타입이지만 어딘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다. 마키오는 냉정하고 침착하지만 스스로를 '인간쓰레기'라 칭하는 약간 파멸적인 인간이다. 세쓰코는 감정이 안정되어 있으면서도 강한 여자다. 리에코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다.

이 네 명은 며칠동안 함께 여행하면서 이 숲을 걷는다. 삼림욕을 하듯이 느긋하게 숲을 걸으면서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함께 했던 시간들을 되새기고 과거에 있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재구성한다. 학창시절 친구들의 문패가 한꺼번에 사라진 일, 친척집에 놀러 갔을 때 새벽마다 들렸던 이상한 울림소리의 정체, 독특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한 친구의 모습까지.

'노스탤지어의 마술사', 온다 리쿠

@BRI@이런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무척 낭만적인 흐름의 소설같다. 하지만 이들 4명에게는 각각 어두운 과거가 있다. 그리고 그 어두운 기억을 찾아서 이들은 서로 대화하고 때로는 티격태격하며 여행을 이어나간다.

아키히코는 방탕한 누나를 부끄러워하면서 증오하고, 리에코는 한때 연인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친구로 돌아온 마키오를 여전히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은 마키오다. 언제나 차분하고 느긋한 마키오, 자신을 속이지는 않지만 태연하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마키오, 그러면서도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마키오.

온다 리쿠는 일본에서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작가다. <흑과 다의 환상>에서 그 노스탤지어의 대상은 숲이자 여행 그리고 친구이자 자신의 과거다. '모든 여행의 종착점은 자기 자신이다'라는 말처럼, 이들 4명은 여행의 끝에서 모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흑과 다의 환상>은 4개의 파트로 나뉘어있다. 여행을 하는 4명의 이름이 각각의 파트 제목이다. 그리고 각 파트는 그 인물이 화자가 되어서 일인칭으로 진행된다. 소재도 내용도 그리고 구성도 꽤나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는 소설이다. 온다 리쿠는 이제 곧 마흔이 되는 남녀의 내면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파헤친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섬이지만, 시간과 인물들의 내면은 현재와 과거를 오락가락한다.

많은 여운을 남기는 <흑과 다의 환상>

<흑과 다의 환상>은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와도 연관이 있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등장인물이었던 '가지와라 유리'가 <흑과 다의 환상>에도 등장한다. 물론 유리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빼어난 외모와 재능을 가졌지만 파괴적인 성격이던 유리, 책을 읽으면서 그 유리에 관한 미스터리를 하나씩 풀어가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은 이렇게 조금씩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연관이 있다. 물론 이런 연관의 출발점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다. 하지만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지 않고 다른 작품을 읽더라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모든 작품은 그 자체로 재미있고 완결된 형태이니까. 다만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이야기의 단편들을 차곡차곡 모아나가는 것도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재미다.

<흑과 다의 환상>을 읽고 나면 많은 여운이 남는다. 여행에 대한 그리움, 태고의 숲이 있는 섬에 대한 그리움 거기에 더해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동시에 온다 리쿠가 앞으로 발표하는 다른 작품에서 어쩌면 세쓰코와 마키오의 이름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까지도. 많은 작품에서 거미줄처럼 인물과 사건을 뒤섞는 솜씨를 가진 작가이니 만큼, 이런 기대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흑과 다의 환상>에서 등장인물들이 언급하는 과거의 사건들 중에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것들이 많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온다 리쿠가 이후에 발표하는 작품들에서 그 베일을 벗겨주지 않을까? 마키오 일행의 여행이 끝나는 시점은 그때일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온다 리쿠 지음 / 권영주 옮김. 북폴리오 펴냄.


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북폴리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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