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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류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 연가>
ⓒ KBS
욱일승천하던 한류의 기세가 한동안 잠시 주춤한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는 객관적인 통계자료로도 드러나고 있다. 한국 드라마의 일본수출액은 2005년 6637만 달러에 이르던 것이 2006년엔 4917만 달러로 줄었고, 한국 드라마를 편성하는 지상파 방송사 수도 같은 기간 격감하고 있다고 한다.

"<겨울연가> 이후 한류 맥을 이을 드라마가 없다"는 일본 현지 언론의 지적은 지금 한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오히려 <봄날>이나 <요조숙녀>처럼 요즘엔 일본 드라마나 소설 등을 한국에서 리메이크 하는 게 붐인 것 같다.

@BRI@사실 이제는 한류의 위기니 혐한류니 한류의 전환기니 하는 말들이 낯설지가 않다. 한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초과학에 종사하고 있지만, 한국 대중문화를 즐겁게 소비하고 있는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 또한 한류가 앞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내 짧은 생각들이 전환기를 맞이한 한류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이 글을 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이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핵심만 요약한다면 '인물보다는 콘텐츠'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그 콘텐츠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토리와 캐릭터의 조합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욘사마의 존재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남자배우 배용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연가>의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는 '준상'의 화신으로서 욘사마를 좋아한다.

중국의 동북공정 탓도 있겠지만, 최근 방송사 드라마를 주름잡고 있는 사극열풍은 이 콘텐츠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5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와 그 속에서의 파란만장했던 우리네 인생사들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고 드라마이며 또 장대한 영화이다.

그래서 사극은 스토리와 캐릭터의 '생산'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역사 혹은 한국학,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전문가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사실 그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이공계는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병역특혜나 BK사업 등 그나마 국가와 사회의 관심이 약간은 있다. 최근의 한 통계를 보면 대졸 취업자의 90%이상이 이공계라고 하니 이 땅 인문학의 피폐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규장각에서 건진 책 하나가 제2의 <대장금> 될 수도

서울대에는 규장각이라는 고문서 보관소가 있다. 여기에는 아직 정체확인도 되지 않은 희귀한 고문서들도 상당수라고 한다. 이들에 대한 번역작업이나 본격적인 연구는 차치하고, 방진이나 방습장치조차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아 이 소중한 유산들이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은 게 10여 년도 넘었지만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한류의 입장에서 투박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잘 건진 책자 하나가 제2의 <대장금>이나 <왕의 남자>를 만드는 셈이다. 한류 열풍을 등에 업고 그 결과물에만 많은 인력과 역량이 집중되고 있는 반면, 이렇게 맨땅에서 보석의 원석을 캐내는, 그야말로 지식과 스토리와 캐릭터를 '생산'해 내는 현장은 방치되고 있다. <난중일기>의 초서본이 번역된 것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이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정부가 학문진흥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국책사업을 벌인다면 넘쳐나는 역사학자들이 묻혀있고 잊혀졌던 우리 역사를 풍성하게 할 것이며 이는 곧 스토리 소재의 원천이 될 것이다.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이렇듯 '과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인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역사와 뿌리가 얕은 미국이 유독 '고전(Classic)'에 집착하는 것은 일종의 자격지심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서부영화와 우주SF를 그들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특히 SF영화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데에는 무엇보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기초과학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큰 밑거름이 된다. 생각해 보라. 우주선을 지구 밖으로 날려보내지 못한 나라에서 어떻게 <스타워즈>같은 영화가 나올 것이며 공룡전문가가 전무한 나라에서 어떻게 <쥬라기공원>같은 영화가 나오겠는가.

▲ 영화 <쥬라기공원 3>의 한 장면.
ⓒ 영화홈페이지
그런 할리우드가 이제는 정말 상상할 수 있는 얘기를 다 했는지 영화소재 고갈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영화도 리메이크 하는가 하면 그들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유럽의 온갖 신화들까지 동원되고 있다.

미국이 '과거'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에서만큼은 아마 할리우드도 한국을 무척이나 부러워할 것 같다. 우리가 살아온 나날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전해주는 이야기들, 어쩌면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만 같은 그 감성들이 사실은 '백만 불짜리' 코드인 것이다.

다시 우리 얘기를 하자면, 한류가 앞으로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미국과는 반대로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현재'와 '미래'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 같은 과학자들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지금 현대의 문명은 '과학문명' 외에는 더 나은 별명이 없어 보인다. 기초과학이란 것이 복잡한 수식과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들의 복합체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 대자연과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의 통합체라고 했을 때,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끝없는 탐구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향유할 이야깃거리, 즉 스토리의 근간을 이룰 것이 분명하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상상력이다

이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공허함이 채워지면 한류의 장르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치지 않고 다큐멘터리 등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될 수 있다. 영국 BBC나 일본 NHK가 세계 최고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의 존재이유를 한류의 새로운 동력에서만 찾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기초학문으로서 그 자체의 존재의의가 있다. 사실 나는 물리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이 발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실제 연구를 하다보면 가장 막히는 부분이 바로 물리적 스토리의 재구성이다.

공식이나 이론을 어느 정도 따라가는 것은 정상적인 정규교육 하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새로운 물리상황을 재해석하고 그것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데에는 그 사회의 전반적인 인문학적 풍토가 큰 도움이 된다. 아인슈타인이 강조했듯이 "상상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 사회는 기초과학이나 인문학이 배부른 인간들의 향유물이며, '기본'이 귀찮거나 고리타분한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하다. 정부조차도 그 긴급함과 절박함, 그 직접적인 파급효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런 '전통'은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다.

조선조 500년은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장 정교하고도 완벽에 가까운 기록문화를 가졌던 시기이다. 한글과 조선왕조실록, 프랑스가 보관중인 외규장각 의궤 등만 봐도 불과 몇 백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기본'에 충실했는지, 그리고 그 기본에 얼마나 많은 국가적 역량을 투입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조선이 서양과학을 제대로만 받아들였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문명을 이루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자주적 근대화의 실패와 식민의 역사가 모든 과거와의 단절을 종용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기본'에 충실하며 학문을 숭상했던 조선의 정신까지 내다버려서는 안 된다.

다른 나라에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팔아먹는 게 한류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류가 유행한 그 근본에는 아시아적 가치의 재발견이라는 공감대가 큰 역할을 한 만큼 바람직한 한류는 흐름이 아닌 소통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타중심주의나 한건주의 등 지금까지 보였던 문제점들을 극복하면서 이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특히, 전환기의 한류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그 핵심 콘텐츠를 체계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생산'해야 하며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자연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의 획기적인 양적·질적 팽창이 시급하다.

정부가 한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처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버려진 근본적인 생산동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 땅에 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아직껏 국가적인 사업으로서의 학문진흥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던 점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한류의 시작을 가능케 했던 것이 사회 민주화에 따른 폭발적인 창작욕구의 분출이었다면, 한류의 재점화를 위한 신형엔진의 역할은 아마도 21세기판 집현전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사를 쓴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태그:#한류, #겨울연가, #쥬라기공원, #겨울연가,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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