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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동대사 대불전. 일본이 세계 최고 최대의 목조건물로 내세우는 동대사 금당이다.
ⓒ 신병철
일본에는 우리의 고대사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많았고, 그 교류의 결과인 유적이 일본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물들 중에 일본 나라지역에 있는 동대사(東大寺·도다이지)만큼 중요하면서도 논란이 많은 곳도 없다.

동대사는 누가 뭐래도 일본에서 가장 큰 절이다. 우리에게도 매우 낮익은 절이기도 하다. 동대사의 부속건물인 정창원에서 국사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는 '신라장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정창원 문서'로도 불리는 신라장적은 통일신라 서원경(청주) 부근 4개 촌락의 경제적 요소들을 조사하여 기록한 문서로 통일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대사가 있는 지역 이름인 '나라'는 꼭 우리말 같다. 8세기에 이곳에 국가가 탄생했는데, 그 국가는 이전과는 달리 일본 자체 정치권력의 성격이 짙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나라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이 지역 나라인 셈이다.

▲ 동대사 남대문과 사슴. 남대문 부근을 사슴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눈여겨볼만한 관광유치방법이다.
ⓒ 신병철
동대사는 속칭 나라공원이라 불린다. 동대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사슴들이 어슬렁거리며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린다. 먹을 것을 줄 것 같은 관광객을 졸랑졸랑 따라 다니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해탈한 뒤 처음 설법한 곳이 녹야원(사슴공원)이었다니, 그것에 착안하여 사슴을 방목한 게 아닐까 여겨진다. 일본의 관광객 유치 작전이 엿보인다. 벳부에 원숭이를 방목하여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사슴이 어슬렁거리는 정문 남대문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문이다. 문위에는 '대화엄사(大華嚴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동대사는 통일신라의 원효와 의상의 화엄사상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그것에 감동하여 지었다고 했는데, 절 이름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동대사 가람배치, 원래 1금당 쌍탑 양식이었고, 주위를 회랑으로 둘렀다. 불국사와 같은 가람배치다. 지금은 쌍탑이 사라졌다.
ⓒ 신병철
남대문을 통과하면 중앙에 중문을 가진 회랑이 가로 막는다. 평지에 있는 절은 절의 경내와 그 바깥을 구분하는 회랑을 지었다. 우리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평지 절간이 이런 회랑을 갖추고 있었다. 불국사는 산지에 지은 절간이면서도 아직 평지절간의 회랑을 갖추고 있다.

동대사의 금당에는 거대한 노사나부처님이 있다. 그래서 금당 이름은 거대한 부처님이 있는 집이라는 대불전(大佛殿)이 되었다. 원래 대불전 앞에는 동서로 두개의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경주의 감은사나 불국사와 같은 1금당 쌍탑 가람배치다. 동대사가 통일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 경주 불국사 가람배치, 대웅전에서 본 석가탑과 다보탑. 1금당 쌍탑 양식은 통일신라식 가람배치이다.
ⓒ 신병철
대불전은 일단 거대하다. 세계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목조건축물이라고 일본이 자랑할만 하다. 8세기 중엽에 동대사가 건립되었다고 하니, 그때의 건물이라면 자그마치 1200년이 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건물의 형태는 그때 지은 것이라고 보기는 무리다.

1층 지붕 중앙의 장치는 일본식이다. 12~13세기의 가마쿠라 막부 시기의 건축 장식이다. 목조건물은 100년 정도 지나면 보수가 필요하다. 보수할 때마다 조금씩 일본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건축방식도 크게 다르다. 우리의 건축은 기둥을 가로 지르는 큰 들보를 중심으로 건물의 무게를 견뎌내는 방식이라면 이 대불전은 가로지르는 작은 부재를 여러 개 걸치는 방식이다.

▲ 부석사무량수전과 동대사대불전 구조의차이. 우리는 굵은 들보로 지붕무게를 유지하지만, 일본은 여러개의 작은 부재로 지붕무게를 분산시킨다.
ⓒ 신병철
당시 일본의 건축술이 통일신라의 도움 없이는 큰 건물을 세우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들보 중심의 통일 신라식 건물이었으나,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일본식으로 바뀌어갔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세웠을 때 대불전은 지금보다 더 컸다고 하니, 크기까지도 점차 변화해 왔던 것은 아닐까 싶다.

대불전은 2층 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내부가 통층으로 큰 불상을 안치시키기 위해 지붕을 2층으로 만든 것이다. 2층 지붕의 체감률이 적당하여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있다.

대불전의 대불은 노사나불로 정말로 거대하다. 그 큰 건물 중앙을 다 차지하고 있다. 손바닥 위에만 사람 16명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노사나불은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나타난 부처다. 화엄사상의 유행과 함께 나타난 대승불교의 부처님 중 하나다. 노사나불은 수행과 공부를 통해서 해탈한 부처로 아미타불도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에 화엄사상이 전달될 때, 지은 절이니 노사나불이 안치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 동대사 노사나불. 거대하고 표정이 없다. 7,8세기 불상의 일반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 신병철
노사나불은 표정은 상당히 굳어 있고 미소도 없다. 당나라 때 불상의 모습이며 통일신라 불상의 모습이다. 경북 군위에 있는 군위석굴암 본존불과 석굴암 본존불의 표정과 유사하다. 손모양(手印)은 오른손은 시무외인이나 왼손은 항마촉지인을 갖추고 있다.

이 당시 우리나라 앉아있는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항마촉지인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예가 별로 없는 손모양이다. 걸친 옷도 양 어깨를 감싸는 통견이다. 토함산 석굴암본존불은 한쪽 어깨에만 옷을 걸치고 있다. 얼굴표정과 통견의 모습은 오히려 군위석굴암의 본존불과 유사하다. 동대사 노사나불과 군위석굴암이 토함산 석굴암보다 조금 먼저 만들어진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고 보인다.

▲ 군위 석굴암 삼존불 중 본존불. 근엄한 표정과 양쪽어깨를 감싼 옷이 동대사 노사나불과 닮았다.
ⓒ 신병철
노사나불 앞에는 당시에 만들었다고 하는 대좌의 위로 핀 연꽃(앙련)이 있다. 크기도 대단하고, 새겨넣은 불상의 모습도 상당히 세련되었다. 당시 불교 그림의 일부를 느낄 수 있다.

노사나불 좌우에는 협시보살 두 분이 앉아 계신다. 그리고 대불전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도 서 있다. 일단 모두 거대하다. 조각 기법도 대단하다. 당시에 만든 것인지 이후 어느 때 만들어 세운 것인지 파악할 길이 없다. 다만 일본화된 모습이 보이지 않아, 8세기에 만든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동대사는 752년에 완공하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완공식은 노사나불의 눈동자를 그려넣은 의식인 개안식을 겸했다. 이때, 통일신라에서 700여명의 사람들이 이 잔치에 참여했다고 한다. 동대사 건립 과정은 일본과 통일신라 사이에 긴밀한 관계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한동안 백제를 지원한 일본과 관계가 소원하였으나, 곧 관계가 회복되고, 양국은 활발한 교류를 벌였다. 이 당시 일본은 수, 당, 신라를 통해서 불교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수와 당보다는 통일신라로부터 직접적으로 불교문화를 전수받았다.

특히 8세기 중엽 일본 쇼무왕(聖武)은 신라의 불경해설서를 구입하여 그것을 옮기는데(寫經) 주력하였다. 이어서 그는 신라 승려 심상을 초청하여 화엄경 강설을 듣고 이에 크게 심취하였다. 화엄경 강설에 감명을 받은 쇼무왕의 발원으로 이루어진 사찰과 불상이 동대사이고 노사나불이었다. 당시 일본의 건축기술 수준을 볼 때 신라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대사의 원래 이름이 대화엄사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 동대사 남대문의 '대화엄사'편액. 원래 저 이름이었으나, 언제인지 모르게 동대사로 바뀌었다.
ⓒ 신병철
2006년 1월의 동대사 남문에는 '대화엄사'라는 현판이 없었다. 그런데, 2006년 12월에 와 보니 새로 만든 듯한 '대화엄사'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 사이에 일본에서, 혹은 일본 문화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런데 동대사 완공식인 개안식에 수백 명의 통일신라 사람들이 참여한 사실을 두고 두 나라는 해석이 크게 차이가 난다. 우리는 당연히 일본에 적극적으로 화엄사상을 전달하고 이어 사찰 건립에 큰 도움을 주었으니, 일본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관계있는 사람들을 점안식에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했다고 해석한다.

▲ 동대사 대불전 정면의 중앙 장식, 일본화되어 간 흔적들이다.
ⓒ 신병철
반면 일본은 <속일본기>라는 사료를 근거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과거 신라는 일본의 신하였는데, 이때 신라왕(당시 경덕왕)이 친히 일본에 와서 조공하려 하였으나, 국정 마비를 우려하여 왕자를 대신 보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즉 동대사 개안식에 참여한 700여명의 사절단은 동대사 개안식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죄단이라는 것이다.

<속일본기>라는 사료의 신빙성을 문제삼지 않는 한 기록에 근거를 둔 일본의 주장을 뒤집기란 쉽지 않다. 임나일본부설이 일본 고대사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과거 일본의 침략 근거가 된 일본의 제국주의사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사관이 고대사 곳곳에 이렇게 산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도 똑똑히 볼 수 있다.

▲ 오사카 중심가에 성인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걸린 일본국기
ⓒ 신병철
어느 것이 진실인가? 나라에 있는 동대사는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이럴 때 동대사는 단순한 관광지만은 아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되살피는 귀중한 자료로 작용하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어느 수준인지 알 길이 막연하다. 일본 역사 기행은 우리의 고대사를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일본을 인식하는 길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안타깝고 어떤 때는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일본, 일본 역사 기행, 참으로 어렵고도 험한 길이다. 그 수많은 자료와 유물과 유적이 우리를 무섭게 한다. 아직도 정창원의 공개조차 되지도 않은 수많은 자료들이, 752년 동대사 노사나불 개안식 때 입었다는 의류들이 우리를 무섭게 한다. 자료가 별로 없이 내세우는 우리들의 주장들이 한낱 오류로 전락해 버릴 것 같은 무서움을 느낀다.

동대사에 가면 일본이 아직도 무섭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1월과 12월에 동대사를 다녀왔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도다이지를 통해서 일본의 고대와 현재를 살표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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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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