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랜덜(Lisa Randall). 최근 과학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성 물리학자이다. 1962년생이니까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46세가 된다.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를 좀 아는 사람들의 말로는 박사과정에 있을 때나 학위를 받고 나서도 한동안 그녀는 그저 '별 볼일 없는' 박사 후 연구원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한다. 학계에 이름을 날리기는커녕 다음 연구 자리를 알아보기에 급급한 보통의 연구원 말이다.
그러던 그녀가 학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것은 1999년 단 한편의 논문 때문이었다. 당시 보스턴 대학의 라만 선드럼(Raman Sundrum)박사와 함께 쓴 < A Large mass hierarchy from a small extra dimension(작은 부가차원으로부터의 거대한 질량 위계) >라는 4페이지 짜리 논문은 수십 년 동안 물리학계가 고민해 오던 '위계질서의 문제(hierarchy problem)'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물리학자가 왜 위계질서를 고민할까
어떻게 보면 물리학자들은 참 쓸데없는 일에 많은 고민을 한다. 위계질서의 문제도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그런 문제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자연계에는 네 가지의 힘이 알려져 있다. 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그리고 강한 핵력. 이렇게 네 힘이 현재까지 인류가 알고 있는 자연의 힘들이다. 중력과 전자기력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힘들이다. 약한 핵력은 핵붕괴와 관련된 힘이고 강한 핵력은 핵자들을 원자핵으로 강하게 묶어 두는 힘이다.
중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 힘들은 이른바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Standard Model)'으로 구축되어 있는데 대략 양성자 질량의 약 1천배 정도 되는 에너지(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공식에 의해 질량과 에너지는 같다)까지 잘 들어맞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에너지에서는 중력의 효과가 극히 미미하다.
중력의 효과가 나머지 세 힘과 비등해지려면 그 에너지가 양성자 질량의 약 10,000,000,000,000,000,000배에 이르러야 한다. 이 에너지를 플랑크(Planck) 에너지라고 부른다. 중력과 표준모형 사이에 왜 이런 거대한 에너지 갭이 존재할까 하는 것이 바로 위계질서의 문제이다.
랜덜과 선드럼에 의하면 자연에는 숨겨진 또 다른 제 5차원이 있어서 (지금 우리는 시공간의 4차원에 살고 있다) 다섯번째 공간의 곡률이 이 엄청난 차이의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과학자가 영화계 거물의 주목을 끈 이유는
사실 4차원 이외의 부가차원(extra dimension)에 대한 논의는 그 역사가 깊다. 예컨대, 가느다란 실을 멀리서 보면 1차원 직선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그 굵기를 따라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에서는 그 이론의 내적 정합성을 위해 시공간이 10차원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부가차원을 도입해서 위계질서의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은 랜덜-선드럼 1년 전에 아르카니-하메드(Arkani-Hamed) 등에 의해 벌써 제기되었는데, 랜덜-선드럼 모델은 이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확인한 바로는 랜덜-선드럼의 그 논문이 무려 3142회 인용되었다. 보통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대략 1500회 이상 인용되어야 한다고 하니까 이 인용횟수가 가지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올 봄 유럽의 어느 학회에 랜덜이 참석하기로 했다가 취소된 사건이 학계에 관심이 된 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어릴 때 영재소녀였던 그녀의 이야기 자체가 영화소재가 될 법도 하거니와, 그녀의 이론 또한 스필버그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어쩌면 머지 않아 <콘택트> 같은 영화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조디 포스터나 그 후임자가 랜덜과 같은 물리학자로 나와 부가차원으로 시간여행하는 그런 스토리로 말이다. 조디 포스터 주연의 <콘택트>는 과학적 고증이 매우 잘 된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입자물리같은 아주 근본적인 학문이 사람들 살아가는 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하지만, 랜덜이 스필버그에게 SF 영화에 대한 과학 자문을 해 주고 또 그 스토리에 영감을 준다는 사실은 기초과학이 우리 일상을 얼마나 풍요롭고 재미나게 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단적인 예가 아닐까. 안 그래도 소재가 바닥난 할리우드에서는 이런 최첨단의 과학이론이 가뭄의 단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구려 전문가 많았다면 <주몽>은 어땠을까
이는 요즘 잠시 주춤하고 있는 우리의 한류열풍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랜덜이 스필버그를 만난다는 소문을 듣고서 나는 십여 년 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스필버그를 만났던 일화가 떠올랐다. 스필버그가 카젠버그와 함께 드림웍스를 출범하면서 투자자를 유치할 때 이건희 회장도 스필버그가 관심있어 했던 투자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저녁을 함께 하며 약 9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이건희를 스필버그가 못마땅해 한 이유는 "대화하는 내내 반도체 얘기가 스무 번도 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건희가 그 자리에 입자물리학자나 한국사 전문가를 대동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우리는 이건희의 낮은 안목만을 탓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 전체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비해 한국 영화는 지금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였고 한국 드라마는 '한류'를 만들어 내며 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성장 속에서도 우리의 근본과 기초는 여전히 십여 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영화든 드라마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콘텐츠이고 그 핵심은 스토리일 수밖에 없다. 이 '스토리'는 '생산'되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담당하는 분야가 바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대변되는 기초학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드라마 <주몽>에서도 끝없이 역사왜곡과 늘어진 이야기 전개 논란이 나오는 이유도 우리나라에 고구려 전문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작가나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보석을 아름답게 세공해야겠지만 또 누군가는 원석을 캐는 일에만 집중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핵심이 되는'스토리'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기초과학자들의 절대적인 숫자가 자생력을 가질 만큼도 되지 않는다.
랜덜이 재직 중인 하버드 물리학과의 경우 교수직이 약 65명으로 서울대의 1.5배정도 된다. 기초과학이나 기초인문학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어떤 스토리를 생산해 낼 능력이 높다는 것이고 요즘 같은 세상에는 그것이 곧 국가경쟁력에 직결되고 있다.
그러니까, 기초학문에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금 당장'을 위해서도 매우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류우드'이니 '한류체험관'이니 혹은 '한류엑스포'니 하는 것들은 죄다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런 데 돈 쓰는 것보다는 자연과학자들, 역사학자들, 인문학자들을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한류발전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글쎄, 내가 랜덜처럼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물리학자들처럼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우리나라 전체를 봐도 향후 몇 년 내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기초학문 육성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벌인다면 적어도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앞서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를 따라갈 수는 있다.
이 정도만 되더라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자연과 우주의 근본원리들은 무엇인지를 더 쉽고 더 넓게, 더 깊게 얘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 아마도 제2의 이건희가 스필버그에게 구박받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런 바탕 속에서라야만 우리도 아인슈타인 같은 수퍼스타의 배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사를 쓴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