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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가 귀양살이 했던 집과 똑같은 초가집(남양주 종합촬영소)
ⓒ 이정근
친위쿠데타가 일어난 이틀 후. 1519년 11월 17일.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로 가는 귀양길에 올랐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대사헌을 죄주는 것은 성은에 어긋난다는 충신들의 직언도 무위로 끝났다. 수많은 성균관 유생과 백성들의 함성도 소용이 없었다. 참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경연에 드나들며 시종했던 신하이기에 많이 봐줘서 유배형을 내렸다는 임금의 은총이다.

"너희들은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인물이 어질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근래 모든 일에 과격하여 평상(平常)하지 못하게 하므로 조정의 일이 많이 그르쳐졌다. 너희들의 죄를 율(律)대로 결단한다면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나, 감(減)하여 죄주는 것이다, 여느 죄수라면 이런 분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조광조 등의 죄는 조율(照律)로 보면 과연 사사(賜死)해야 하겠으나 깊이 생각하고 또 대신의 말을 반복해서 생각하니 사사하면 놀랄 듯하다. 조광조 등 4인은 감사(減死)하여 고신(告身)을 진탈(盡奪)하고 장 1백(杖一百)에 처하여 원방(遠方)에 안치(安置)하라. 윤자임(尹自任)등 4인은 고신을 진탈하고 장 1백을 속(贖)하고,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라."(중종실록)


의금부 감옥을 떠나던 날 의금부 당상이 읽어 내린 임금의 교지다. 어떠한 죄를 지어서 벌을 준다는 죄명도 없다. 그저 과격해서 죄준다는 두루뭉술한 내용이다. 무릎 꿇고 임금의 교지를 듣는 순간 조광조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회한의 눈물도 아니고 참회의 눈물도 아니었다. 임금과 면대할 수 있는 기회상실의 눈물이었다.

임금 얼굴도 못보고 귀양 떠나는 조광조

조광조는 토론의 달인이었다. 경서와 성리학과 도학으로 완전무장한 그의 논리에 당할 자가 없었다. 조광조는 임금과 면대하면 임금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훈구세력은 이러한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면 기회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임금이 친히 문초하는 친국을 그토록 원했지만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대로 떠난다니 한이 맺힐 것만 같았다. 허나, 이제는 지나간 일. 떠나야 한다.

훈구세력의 계획은 치밀했고 표적은 적중했다. 승승장구하던 신진사류는 한방에 갔다. 정점에 있던 조광조가 하옥되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와해됐다. 왜 그랬을까? 친위쿠데타를 기획하고 연출한 화천군 심정은 판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또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임금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대척점에 있던 조광조는 낙관적인 안목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2년 전. 사헌부 대문에 화살이 날아와 꽂힌 일이 있었다. 올해 정월에 사정전 정원에 화살이 날아왔고 2월에는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에 꽂혔다. 수구세력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조광조는 무시했다. 군자가 가는 길엔 문이 없고 소인배들의 협잡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 숭례문
ⓒ 이정근
조광조를 태운 함거가 숭례문을 빠져나오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안타까운 눈빛이다. 그 눈빛에는 신무삼간에 대한 증오의 눈빛도 섞여 있었다. 방책을 두른 함거에 손을 넣어 조광조의 손을 만져 보려고 소동이 빚어졌다. 그래도 의금부 군졸들이 심하게 다루지 않았다. 청파역에서 길라잡이를 앞세운 의금부 군졸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 당시 한양외곽에는 삼남지방으로 가는 청파역과 관북지방으로 가는 송우역이 중앙역 구실을 했다. 역에는 말 타고 달리는 파발과 걸어서 움직이는 보발이 있었다. 지역 지리에 익숙한 이들이 안내자 역할을 했다. 유배행렬은 죄인을 태운 함거와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보발이 나섰다.

한강을 건너는 거룻배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궁성과 함께 삼각산이 눈에 들어왔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에 입성할 때 높고 푸르기만 하던 삼각산이 초라하다. 강물을 바라보니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산천은 의구하건만 자신만 변한 것 같았다. 알성시에 나아가 임금의 마음을 흔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죄인이라니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를 추구했던 조광조

나루터를 떠난 거룻배가 강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었다. 물이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강물은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물이 무서웠던지 수레를 끌고 가는 소가 두 눈을 껌벅이며 조광조를 쳐다본다. '나는 무서워 죽겠는데 대감은 무섭지 않느냐?'는 눈빛이다. 조광조의 입가에 비치던 웃음이 강바람에 날아간다. 함거에 홀로 앉은 조광조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 많은 물들도 출발은 각기 달랐겠지? 금강산에 떨어진 빗방울, 여주, 이천 평야를 적시고 흘러내린 물, 용문산 골짜기에서 졸졸거리던 물. 하지만 뭉쳐서 한곳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이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맞아, 빗방울이 강을 만나 물답게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겠지. 지금 흐르고 있는 이 물은 천방지축으로 뛰던 빗방울이 아니고 잘 다스려진 물이야.'

임금도 인간이고 백성도 인간이기에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를 지향하는 지치주의로 가자고 굳게 다짐했던 임금이 야속했다. '지금 이 순간 임금은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인간일까? 지금 이 순간 나 조광조는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인간일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회의가 들었다.

▲ 조광조가 어릴 때 뛰어놀던 고향마을에 있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용인)
ⓒ 이정근
뱃전에 부딪치는 물결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꼭 다시 돌아올 테다. 잘 있거라 삼각산아! 다시보마 한강수야"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은 다음 문제고 자신이 왜 죄인이 되어 귀양살이 떠나는지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남태령 고개를 힘겹게 오르던 유배행렬이 정상에서 잠시 멈췄다. 수레를 끌고 가는 소도 쉬어야 하고 호송하는 군졸들도 휴식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관악산 줄기가 뻗어 내린 남태령 정상에서 바라보니 삼각산이 아스라이 시야에 잡힌다. '이제 여기를 출발하면 한양은 보이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왔다.

유배지까지 조광조 호송책임을 맡은 의금부 당상이나 군졸들이 조광조에게 심하게 굴지 않았다. 그들도 조광조가 억울하게 귀양 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죄인이지만 유배가 풀려 복직되면 하늘같은 대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임금을 믿고 싶었던 조광조

과천을 지날 무렵 유배행렬을 숨 가쁘게 뒤쫓아 오는 젊은이가 있었다. 신상과 유운이 보낸 유생이었다. 조광조를 존경하는 선비의 입장에서 조광조가 아무런 전후 사정도 모르고 귀양 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함거에 도착한 유생이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두루마리를 꺼내어 조광조에게 전했다.

'남곤, 홍경주, 심정(沈貞) 등이 남곤의 집에서 회의하여 먼저 참설(讖說)로 임금의 마음을 요동하고 거사하던 날 저녁에는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 임금을 추자정(楸子亭)에 모시어 의논하고 의논이 끝나고서 도로 나와 연추문(延秋門)으로 들어가 합문(閤門) 밖에서 대신들을 불러 그 이름을 열서(列書)하여 마치 조정에서 죄주기를 청해서 죄를 준 양으로 하였다.'

서찰을 읽어본 조광조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 어찌 그렇게 하려 하셨겠는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

조광조는 끝까지 임금을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던 그날 밤. 짐작은 했지만 이제야 밑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천하의 소인배들 같으니라구…." 신무삼간을 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조광조 선영 묘역
ⓒ 이정근
과천을 지난 귀양행렬이 죽전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조광조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서 10리만 가면 조상이 잠들어 있는 선영이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분묘에 시묘하며 3년을 보냈던 상현리가 지척이다. 그렇지만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볼 면목이 없었다.

의금부 당상이 선영에 참배하고 가라고 권했지만 조광조는 사양했다. 죄인의 몸으로 조상을 뵈올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은 수레에 실려 가는 몸이지만 가마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꼭 찾아뵙겠노라고.

조광조가 죄를 받아 귀양 간다는 한양소식이 전국에 퍼졌을까. 유배행렬이 천안을 통과 할 때에는 영남의 유림들이 몰려와 함거를 가로 막고 대성통곡했다.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함거에 앉아있던 조광조는 오히려 이들을 위로했다. 조광조를 태운 함거가 지나는 길목마다 그 고을 관원들과 유림들이 몰려나와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하늘이 요동하는 천재지변에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하고

공주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난생처음 전라도 땅에 들어간 것이다. 조정의 신하들이 훈조십요를 들먹이며 그렇게도 경원했던 전라도 땅에 들어와 보니 너무나 평화로웠다. 산은 온순해 보였고 들판은 양순해 보였다. 조광조의 마음은 착잡했다. 고개를 들어 임금이 있는 북쪽을 쳐다봤다. 그곳이 오히려 간신이 우글거리는 역신의 땅인 것 만 같았다.

조광조의 귀양행렬은 남행을 계속했다. 여산, 삼례를 지나 순창에 이르렀을 때였다. 전라도에 천재지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광조가 잡혀가던 날. 남원과 화순동복 그리고 해남에서 태양이 하얗게 보이는 변이 일어났으며 어제는 장흥에 큰 눈이 내리고 함평에는 매실만한 우박이 내렸다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구례에선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가뭄이 들면 임금이 사직단에 나아가 기우제를 드리던 그 시절. 천재지변의 여파와 원망은 모두 임금에게 쏠렸다. "임금이 죄 없는 사람을 죄주어서 그런다" "간신들을 벌주려고 하늘이 움직였다" "간신들에게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했다. 조정에서도 어전회의를 가졌지만 별무대책이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신무삼간에게 "너 떨고 있지?"라고 누가 물었다면 "네"라고 답했을 것이다.

▲ 조광조가 사사 당했던 곳에 복원한 애우당 입구(능주)
ⓒ 이정근
담양을 지나 화순 너릿재에 도착했다.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조광조가 귀양살이해야 할 화순 땅이고 조금만 더 가면 능주다. 고갯마루에서 광주 쪽을 내려다 봤다. 금방이라도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필의 말이 달려올 것만 같았다. 유배를 거둔다는 임금의 전지를 가슴에 품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허나, 일행이 휴식을 끝내고 출발 할 때까지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한양에서 유배지 능주까지 750여리. 한양을 출발한 유배행렬이 10일 만에 능주에 도착했다. 지리산과 백아산 그리고 무등산으로 연결된 용암산이 멀리 우뚝 서있다. 능주 평야를 적시는 지석강 물에 비치는 산 그림자가 아름다운 연주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담한 고을이다. 소식이 먼저 전해졌는지 능주 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죄인을 호송한 의금부 군졸들은 능주 관원들에게 죄인을 인계하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 무리에 섞여 양팽손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절조와 의리의 사나이로 칭송받고 있는 사나이다. 나이는 비록 조광조가 위지만 나란히 사마시에 응시하여 조광조는 진사시에 양팽손은 생원시에 장원급제했다. 관직에서도 조광조가 앞서가면 뒤따라가던 각별한 사이다. 양팽손이 지난 3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에 있다가 조광조가 자신의 향리로 귀양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위대한 개혁사상가 조광조 선생의 생애를 다룬 기사에 관심 가져 주시는 독자여러분 감사합니다. 518년 조선 역사를 뒤돌아보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명멸합니다. 그중에서 가슴에 새겨진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독자여러분들은 정도전, 조광조, 정약용 선생을 지목하는데 주저함이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절대 왕권시대.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명제를 권력유지에 악용한 위선을 배격하고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펼치려는 그분들의 숭고한 위민사상을 존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광조 선생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결정판이 다음 편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목은 '조광조를 논고 한다'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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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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