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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주 지석강에 비친 연주산과 고목나무
ⓒ 이정근
살을 에는 북풍한설이 매섭다. 한해도 저물어가는 섣달 스무날. 무등산을 넘어온 북서풍이 용암산을 만나 눈을 많이 뿌리는 고을이 능주다. 오늘도 어제 내린 눈 위에 싸레기 눈이 휘날린다.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넘어 감나무에 한 쌍의 까치가 날아와 울어댄다. 연주산에 걸친 태양이 조광조가 귀양살이 하고 있는 초가집을 비추고 있다.

능성(綾城) 밖 외딴곳에 위치한 초가삼간. 유배생활도 20여일이 지났으니 조금은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구차스러운 오두막 살이다. 다 헤진 문풍지에 황소바람이 드나들고 방안에 걸레가 꽁꽁 얼어 버린다. 동지를 넘긴 추위가 여간 매섭지 않다.

▲ 능주에 복원된 조광조가 유배생활 했던 초가집
ⓒ 이정근
"죄인은 어명을 받으시오."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가 사립문을 밀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방안에서 책장을 넘기던 조광조는 용수철처럼 마당으로 튀어나갔다. 유배를 거둔다는 희소식이라도 가져온 걸까? 아니면? 많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친다. 이것도 잠시, 임금의 명을 받들어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 유엄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 김식, 김구는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극변(極邊)에 안치하라."

눈발위에 무릎 꿇고 유엄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던 조광조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약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이른 아침 까치가 울어대어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려니 했는데 사약이라니 청천벽력과 같은 날벼락이었다.

▲ 심곡서원. 조광조를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용인에 있다
ⓒ 이정근
개혁 가도를 질주하던 조광조를 귀양 보낸 훈구세력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조광조를 의금부 감옥에 하옥했을 때 사사(賜死)하기로 한 임금이 마음이 변해 귀양으로 형을 감해 유배 보내지 않았는가. 심약한 임금이 또 언제 마음이 변해 조광조를 한양으로 불러 올릴런지 모른다.

조광조를 죽여 없애지 않고서는 편하게 잠들 날이 없을 것 같았다. 모사꾼 심정이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능주에 귀양가있는 조광조를 현지에서 죽여 없애자는 것이다. 기획안은 이렇다. 의금부 감옥에서 심문 받을 때 불손했던 점을 반복적으로 고변하여 임금을 흔들고 후궁을 동원하여 베갯머리 속살거림으로 임금을 공략하자는 양동작전이었다.

"첩이 왕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조광조가 시강관 시절 이 말을 임금에게 했다는 소리가 전해지자 경빈 박씨가 눈에 불을 켜고 날뛰기 시작했다. 임금의 총애를 받기위하여 어리고 고운 희빈 홍씨와 각축전을 벌이던 경빈 박씨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조광조가 살아 돌아온다면 후궁들은 모두 궁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심정의 꼬드김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왕정쿠데타로 조광조가 의금부 감옥에 갇히던 날. 심문관 병조판서 이장곤과 홍숙이 문초할 때 반말을 지껄이며 이들을 조롱했다는 보고를 받은 임금은 진노했다. 기고만장한 이들 신진사류의 행동은 불쾌를 넘어 국법을 문란케 하고 임금 자신을 능멸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모사꾼 심정의 선택은 절묘했고 약발은 즉각 나타났다. 조광조의 유배를 거두고 사사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 조광조 적려유허비 비각(능주)
ⓒ 이정근
"나는 참으로 죄인이오."

고개를 떨어뜨린 조광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평화스러운 고을 능주에 어명으로 포장된 살육의 장이 마련되었다. 조광조가 붕당죄로 의금부 감옥에 하옥 된지 딱 한 달. 능주에 유배 된지 20일 만에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오늘이 그 명을 집행하는 날이다.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소?"
조광조의 항변에 금부도사 유엄이 쪽지 하나를 보여줬다.

"내가 전에 대부(大夫) 줄에 있다가 이제 사사받게 되었는데 어찌 다만 쪽지를 만들어 도사에게 부쳐서 신표로 삼아 죽이게 하겠소?"
조광조의 뜻은, 임금이 모르는 일인데 조광조를 미워하는 자가 중간에서 마음대로 만든 일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죄인은 무엄하게도 어명을 따지려 드는 것이오?"
"도사를 불신한 것이 아니오니 너무 노여워 마오. 그래 지금 정승에는 누가 있고 심정은 어느 벼슬에 있소?"

"남곤 대감이 영상에 계시고 금부당상은 심정대감이시오"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

조광조는 체념했다. 그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다면 자신의 죽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모든 것을 단념한 조광조는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연주산에 걸쳐있던 흰 구름이 날개가 되어 흘러간다.

"조정에서 우리를 어떻게 말하오?"
"왕망(王莽)의 일에 비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조광조의 입가에 서리던 웃음이 바람에 날려간다. 자신을 천하의 간웅 왕망에 비한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왕망을 입술에 올리는 자들이 오히려 왕망이로다. 조광조의 눈이 빛났다.

"왕망은 사사로운 일을 위해서 한 자요. 군자가 대의를 쫒다 죽음을 받았소만 죽으라는 명이 계신데도 한참 동안 지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내가 글을 써서 집에 보내려 하며 분부해서 조처할 일도 있으니 마무리가 끝나고 나서 죽는 것이 어떻겠소?"

머뭇거리던 금부도사 유엄이 허락하였다.

▲ 절명시 비석. 조광조 묘역에 있다.(용인)
ⓒ 이정근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아래 세상 내려다보고 있나니
가이 없는 이내 충정 길이길이 비추리라


쌓인 눈 위에 하얀 종이가 펼쳐지고 먹을 머금은 붓이 빠르게 지나간다. 먹 선이 가는 곳에 조광조의 마음이 그려졌다. 검은 먹 점이 글씨가 된 형체위에 하얀 눈발이 날린다. 붓 끝에 조광조의 염원과 회포가 알알이 맺혔다. 붓을 놓은 조광조는 북쪽 하늘을 쳐다봤다. 심호흡을 하는 조광조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 이것이 진정 죽음을 앞둔 절명시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조광조는 시중을 들던 사람들에게 일렀다.

"내가 네 집에 묵었으므로 마침내 보답하려 했으나 보답은 못하고 도리어 너에게 흉변(凶變)을 보이고 네 집을 더럽히니 죽어도 한이 남는다."

말을 마친 조광조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4배를 드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군신의 예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유엄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든 조광조는 단숨에 들이켰다. 독기(毒氣)와 주기(酒氣)가 온 몸으로 퍼져 나간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무릎이 꺾인다. 엄습해 오는 통증과 환각이 구름 위를 나는 것만 같았다. 이때였다. 혼미한 정신 속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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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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