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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 고통의 한계까지 시달렸을 때, 삶 전체를 화끈거리고 욱신거리는 하나의 상처라고 느낄 때, 절망을 호흡하고 희망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 - 헤르만 헤세

▲ <죄와 벌>
ⓒ 열린책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에 범우사에서 출판되었던, 신문 활자보다도 작은 글씨가 빼곡히 700페이지 가까이 채워진 그 책을, 재미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라스꼴리니꼬프가 왜 사람을 죽였는지도 의문이었고, <죄와 벌>에서 묘사된 뻬쩨르부르그의 거리가 왜 그렇게 우울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오기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 <죄와 벌>을 다시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에 속하는 다른 작품들 <백치> <악령> <미성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차례대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도 알 것 같고, <죄와 벌>에서 시작해서 <악령>을 거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도 감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읽어보고 싶고, 소장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한 작가에 대한 애정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막연한 수집의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막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2000년에, 열린책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발간했고 난 카드를 긁어서 그 전집을 구입했다.

그해 여름휴가 때는 아무데도 가지 않고 도서관에 처박혀서 폭식하듯이 그 전집을 읽어치웠다. 에어컨 때문에 서늘하고 조용한 도서관, 칸막이가 있는 작은 좌석에 앉아서 한 권 한 권 그 전집을 읽어나갈 때의 행복했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인간의 내면만을 다루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에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의 유년기는 어떤 의미에서 독특한 시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친구와 교제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그리고 방탕하고 가혹한 지주였던 작가의 아버지는 1839년에 농노에게 맞아 죽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 기록은 없지만, 이 사건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부친 살해'라는 모티브는, 어린시절 농노에게 죽임을 당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린시절에 친구와의 교제를 금지당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독서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6세가 되어 학교에 들어가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별다른 친구들을 사귀지 못한 채 혼자서 뭔가를 읽거나 뭔가를 쓰면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작가는 18세가 되어서 자신의 형에게 편지를 보낸다.

"인간은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풀기 위해 인생 전부를 바친다 해도, 시간을 낭비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내가 이 신비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에서 대자연의 정취나 전원생활의 낭만을 묘사하지 않는다. 위 편지의 암시적인 내용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끌렸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대도시의 빈민들, 온갖 고뇌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에게 한편으로 동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죄와 벌>을 좋아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죄와 벌>에는 대도시 뻬쩨르부르그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등장인물들, 가난한 빈민의 눈으로 바라본 대도시의 우울한 사회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살인'으로 자신의 위치 확인해 보는 라스꼴리니꼬프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가정환경 때문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영혼을 숨 막히게 하는 좁고 답답한 방에 틀어박혀서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체계화시킨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과 극소수의 비범한 사람들로 나눈다. 그리고 비범한 사람들에게는 권리가 있다.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양심상 모든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자신이 그런 권리를 가진 비범한 사람들에 속하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위치를 시험해보게 된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자인 노파와 그 동생을 도끼로 살해한다.

결과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는 실패했다. 살인을 한 후에 그는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면서 온갖 발작적인 행동을 보인다. 표면적으로 그 살인과 라스꼴리니꼬프를 연관시킬 단서는 없다. 하지만 사건후 라스꼴리니꼬프의 이상한 행동에 호기심을 느낀 예심판사 뽀르피리는 그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서서히 라스꼴리니꼬프를 조여 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고뇌에 시달리던 라스꼴리니꼬프는 결국 쏘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만다.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야, 어서 알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벌레인가, 아니면 인간인가를 말이야. 내가 선(線)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죄와 벌>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열정적인 라즈민, 비열한 루진, 탐욕스러운 스비드리가일로프 등. 이 무수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라스꼴리니꼬프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적인 인물일 뿐이다.

루진도 스비드리가일로프도, 라스꼴리니꼬프와의 마지막 만남을 기점으로 무대에서 퇴장한다. 작품의 거의 모든 장면에는 라스꼴리니꼬프가 등장한다. 그는 주변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모습을 하나하나 독자들에게 드러낸다. 결국 <죄와 벌>은 라스꼴리니꼬프라는 한 청년의 내면과 영혼에 관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중요한 의문을 갖게 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왜 실패했을까?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특별히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던 그 사상은 애초부터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라스꼴리니꼬프의 이 흥미로운 사상은 뒤에 <악령>의 끼릴로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 까라마조프에게로 이어진다. 하지만 끼릴로프, 이반과 라스꼴리니꼬프는 다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많은 장면에서 불안에 떨고 두려워하며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강박적인 애정을 보인다. 내가 <죄와 벌>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고뇌하는 인간'의 전형이 되어버린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뻬쩨르부르그의 거리를 상상해본다. 안개 자욱한 백야의 도시 뻬쩨르부르그. 그 한 귀퉁이에 세워진 낡은 건물의 어두운 다락방. 그 안에서 작은 촛불을 켠 채 삶과 철학의 문제로 번민하는 영원한 학생 라스꼴리니꼬프.

한 비평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가리켜서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라고 표현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을 파헤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환희에 가득 찬 가슴은 인생이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진지한 이성은 삶은 고통과 공포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 모순으로부터 빠져나갈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입니다.


죄와 벌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민음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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