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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핵무기고를 계속 늘려갈 입장도 감추지 않았다. 사진은 2002년 8월 13일 촬영한 북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
ⓒ 연합뉴스

북한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분주한 대응과 해법을 둘러싼 논의에서 간과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2차 북핵 위기를 불러 온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이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점이다.

북한이 10월 9일 실험을 실시한 핵무기는 '플루토늄탄'으로 판명됐다. 미국이 제기했던 HEU 의혹과 직접적 관련은 없었던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 계획은 결국 '플루토늄탄' 쪽이었으며, HEU 계획은 단지 '의혹'에 불과했던 것인가? 아니면 이번 실험대상은 플루토늄탄이었지만, '우라늄탄' 개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미국 정부는 '헛다리'를 짚어 협상을 결렬시키고, 북한에게 플루토늄 핵개발을 완성할 시간만 벌게 해줬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후자라 하더라도 미국은 현 단계 북한의 HEU 프로그램 진척 정도에 대한 정보판단을 공개하고, 총체적인 북핵 문제의 대응방안에 포함시켜 논의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할 책무가 있다.

2차 북핵 위기의 '증거'는 북한의 '시인'뿐

2002년 10월 당시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했다.

2001년 조지 부시 정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이뤄진 미 고위관리의 방북에 북·미간 직접대화에 대한 기대감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켈리 차관보가 가져온 결과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북한이 HEU란 새로운 핵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스스로 이를 인정했다는 것.

일본 <아사히신문>의 저명 칼럼니스트인 후나바시 요이치는 최근 발간된 저서 <더 페닌슐라 퀘스천- 한반도 제2차 핵위기>에서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 관계자들의 광범위한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 오마이뉴스 남소연
"켈리 차관보 일행이 HEU 의혹을 추궁하자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말했다. '우리가 고농축우라늄 계획을 갖고 있어서 무엇이 나쁘다는 건가. 우리는 고농축우라늄 계획을 진행할 권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만들게 돼있다.'

켈리는 눈앞에서 급히 메모를 써서 옆에 앉아있던 잭 프리챠드 한반도평화담당특사에게 건넸다. '들었지? 지금 이야기. 틀림없이 인정한 거지?'"

…(중략)…워싱턴에 돌아온 켈리는 국무부 상층부에 방북 결과를 보고했다.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의 최초 반응은 '정말 그렇게 말한 거야?'였다. 콜린 파월 장관도 '정말 가지고 있다고 말했어?'라고 말꼬리를 올렸다. 파월은 이를 부시에 보고했다. 부시도 '에! 뭐라고? 인정한 거야!'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놀라움과 의외라는 느낌이 공유됐던 것이다. '부정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인정했기 때문에, 자 그럼 어떻게 할까, 모두 곤혹스러워 했다'(미 정부고위당국자)"


이것이 바로 북한의 핵실험으로까지 이어진 '2차 북핵 위기'의 출발이다.

엄청난 사태로 이어진 사태의 발단치고는 어처구니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당시 북한이 HEU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증거는 북한의 '시인'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파키스탄에서 북한으로 원심분리기의 기술과 재료가 들어갔다는 첩보 수준의 근거를 가지고 북한을 추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리송한 '북핵' 발언, 과연 '시인'이었을까

그러나 강석주가 켈리에게 한 말이 과연 '시인'을 의미한 것이었는지에는 해석이 엇갈린다.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 곧 '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만들게 돼있다'도 여러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법이다.

미 국무부 소속 통역관으로 켈리 차관보 방북에 동행했던 김동현(미국명 '통 킴')씨는 지난해 7월 은퇴한 뒤 당시 상황에 대해 "켈리가 강석주에게 증거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북한이 시인(admit)했다기 보다는 수긍(acknowledge)했다고 보는 게 더 가깝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북한의 시인을 받아냈던 것처럼 발표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 설명이다.

켈리 방북 한달 뒤 북한을 방문했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도 북한이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는지에 대해 "혼란스럽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북한은 일관되게 HEU 의혹을 '근거 없는 얘기'라며 부정하고 있다. 미국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왜 미국 앞에서는 시인하고 대외적으로는 부정하는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미국은 이후 북한의 HEU 의혹에 대해 추가로 증거를 공개한 것이 없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최근 발간한 자서전 <사선에서>를 통해 북한의 HEU 문제를 언급했으나, 북한이 "우리는 훨씬 더 정교한 기술을 갖고 있다"며, 우라늄 농축기술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애매하게 상황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악화되는 상황을 방치한 미국

켈리 방북 이후 모든 상황은 엉클어져 버렸다. 미국은 즉각 북한에 대한 중유 제공을 중단했다. 이는 부시 정권 출범 이후 위태롭게 명맥을 유지해오던 북·미간 제네바합의가 완전히 깨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과거 핵 활동에 대한 규명을 일단 장래의 과제로 미루고, 현재와 미래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합의였다. 중유 제공은 핵 동결에 대한 보상 성격이었다.

▲ 위성에 바라본 북한 영변 핵 시설단지.
ⓒ 2003 몬테레리 연구소
이것이 중단되자 북한은 즉각 핵 활동 재개로 맞섰다. 북한은 2002년 12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을 영변에서 추방했다. 다음해 1월에는 영변 저장시설에 밀봉 상태로 보관하고 있던 폐연료봉을 꺼내 트럭에 싣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장면이 미 정찰위성에 포착됐다.

북한은 2003년 7월 뉴욕 채널을 통해 미국에 "폐연료봉 8천개의 재처리를 완료했다"고 통보했다. 그 직후 북한 주변 대기에서 플루토늄 제조시 발생되는 방사성 가스 클립톤85가 검출되기도 했다. 그 해 10월에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성명을 통해 폐연료봉 8천개의 재처리를 선언했다.

이와 함께 북한은 제네바합의에 따라 정지시켰던 영변의 5㎿급 실험용 원자로를 2003년 초부터 재가동시키기 시작했다. 2005년 4월에는 이 시설의 가동이 일시 정지된 것이 미 정보당국에 의해 확인됐다. 또 다시 재처리를 위해 폐연료봉을 원자로에서 꺼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북한은 그 해 11월 "8천개의 폐연료봉을 꺼내는 작업을 마쳤다"고 발표했다.

제네바합의 명맥을 유지했더라면...

폐연료봉 8천개는 17~33㎏의 플루토늄을 제조할 수 있는 분량이다. 원자탄 1개를 만드는데 필요한 플루토늄의 양이 5~6㎏이라고 하니, 동결 상태에 있던 8천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했다면 4~6개의 원자탄을 만들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2005년에 실험용 원자로에서 꺼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폐연료봉 8천개도 재처리를 마쳤다면 추가로 4~6개의 원자탄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북한은 제네바합의 이전에 확보한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제조했을지도 모른다. 북한은 1989년 영변 원자로를 70일간 정지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사이에 폐연료봉을 꺼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이를 재처리했다고 해도 추출한 플루토늄은 원자탄 1~2개를 만들 정도의 분량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즉, 미국이 2002년 중유 제공을 중단하지 않고 일단 제네바합의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다른 해결책을 찾았더라면 북한이 지금처럼 많게는 12~14개의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까지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시 정권은 HEU 의혹을 제기한 이후 북한에 대해 '대화'와 '압박'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면서 결국은 사태 악화를 방치해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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