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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여행 중에, 어머니.
ⓒ 나관호
어머니에게서 가끔 똑 튀어나오는 말은 웃음과 놀라움을 준다. 며칠 전에 있었던 우리나라와 가나의 축구경기를 보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갑자기 말씀하셨다.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잘 뛰네?"
"어머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어머니의 말씀에 기분이 좋아졌다. 크든 작든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신다는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축구경기를 보면서 일종의 분석적인 단어를 쓰신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그래서 내가 말을 이었다.

"맞아요, 어머니. 빨간 옷은 우리나라구요. 흰 옷은 가나라는 나라 사람들입니다."
"그래. 흰옷 입은 사람들이 잘 뛰네."

어머니가 말씀하셨을 때는 전반 초반이었다. 마치 해설자 같은 어머니의 분석대로 우리나라가 패했다. 어머니 눈에도 공을 자주 잡고 있는 가나 선수들의 모습이 들어 온 모양이다. 어머니에게 이젠 내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냈다.

"축구 경기에 대해 아세요?"
"잘 몰라. 공 차는 거지 뭐."
"맞아요. 공 차는 거예요. 손으로 잡으면 안돼요."
"그래."
"그리고 11명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 사람은 항상 나와."
"누구요?"
"저 사람 말야."

화면을 보니 빨간 옷을 입은 응원단들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아마 월드컵 때 빨간 티셔츠 입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잔상이 깊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월드컵 때도 방에 들어가 우리나라 이기라고 기도하셨던 어머니다. 어머니에게 응원단은 자주 보는 이웃처럼 느껴지신 것 같다. 어머니에게 설명해 드렸다.

"저 사람들은 응원단이에요. 우리나라 이기라고 하는 거예요."
"아휴. 사람도 많네. 그런데 흰옷이 잘해."

어머니 같은 어르신들은 한번 들어온 생각이나 집착한 상황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하고 생각하신다.

치매 노인을 둔 가족들이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치매 노인들은 오로지 지금 생각만이 모든 것이고, 지금 상황만이 과거, 현재, 미래이기 때문이다. 머릿속 지우개가 움직이면 시간의 흐름이 이미 정지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다시 말했다.

"맞아요. 어머니. 흰옷이 잘해요. 그런데 빨간 옷도 잘해요."
"맞아. 빨간 옷도 잘하네. 저게 뭐야?"
"추구라는 거예요. 축구."
"축구! 나도 저거 좋아했는데."

어머니 같은 분들은 어떤 상황이든지 자신이 당한 일이고, 가본 곳이고, 해본 일이며, 만난 사람이다. 그런 반응을 보이실 때 짜증이나 소리 지르지 말고 그냥 노인들의 반응을 인정해드리면 좋다. 그리고 차근차근 하나씩 바르게 정리해드리면 이해하신다. '인내와 반복'은 가족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약이며 무기다. 추구가 끝나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뭐 좀 드시겠어요?"
"난, 밥 먹었는데. 잘 때라서."
"어머니, 아직 주무실 때 안됐구요. 간식 드세요."

어머니에게 포도를 드렸다. 안드신다더니 맛있게도 드신다. 그러시더니 포도 알 몇 개를 손으로 따시더니 말씀하신다.

"저 사람들 갔다 줘."
"누구요?"
"저 사람 말야. 자꾸 나를 쳐다보고 그래."

어머니가 쳐다본다는 사람은 바로 드라마 속 사람들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카메라 앵글이 정면으로 잡히면 마치 어머니는 자신을 보는 것 같으신 모양이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가끔 그렇게 말씀하시곤 해서 웃음을 만드신다. 예를 들면 늦은 시간 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끔 "왜, 저 사람들은 밤에 잠도 안자고 저러니"라고 하신다. 프로그램 속의 사람들이 현실로 느껴지시는 것이다. 그러면 한바탕 배꼽 잡고 웃는다.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 것은 연속극이에요. 영화처럼 카메라로 찍어 놓았다가 하는 거요."
"연속극. 호호호. 나는 진짠 줄 알았어."

어머니는 바로잡아 드리면 이해하신다. 이런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배운다. 착각했고 오해했지만 바르게 알았을 때는 자신을 정정할 줄 아는 사람이 바르다는 생각이다. 실수도 인정할 줄 알고, 잘못은 말하고, 고마움은 표시하고, 칭찬을 말하고, 격려를 할 줄 알고, 돌이킬 줄 아는 인생이야말로 성숙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오늘도 나에게 또 하나의 '잘 사는 인생코드'를 가르쳐 주셨다. 고집 피우지 않고 사는 삶, 넓게 보는 마음, 나보다 이웃을 보는 마음, 그리고 자신 스스로 마음속에서 자정운동을 벌여 마음을 닦는 것이 도사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우리 어머니는 연륜 있는 인생이시다.

"한 수 배웠습니다. 어머니."

덧붙이는 글 | 나관호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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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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