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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팠던 노야님

갑자기 서울에 다녀 올 일이 생겼다. 4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열명에도 이르지 못할 만큼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서 낯가림을 심하게 해온 나에게 인터넷은 새롭고 중요한 소통의 수단으로 다가왔다.

한겨레 토론 마당(한토마)에 논객으로 등록한 이후 어설픈 독수리 타법으로 글 하나를 쓰는데 몇 시간씩을 허비하며 나의 생각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한 게 어느 시점이 지나면서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자연스럽게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 활짝 웃고 있는 노야님.
ⓒ 서태영
노야님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은 사라진 오마이뉴스 토론방(오토방)이었다. 당시 오토방에서는 진보 논객과 수구 논객 사이에 치열한 색깔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나 역시 그 곳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게시글이나 토론에 참여한 논객 숫자에서 절대적 열세에 있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 시점에 노야님은 아주 수줍게 나의 글에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그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노야님과의 교감은 한토마를 통해 계속 자라갔고, 언젠가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 분을 만날 거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지만 뉴욕에 거주하는 그 분을 만날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2005년 6월 뜻밖의 낭보가 찾아들었다. 노야의 평생의 연인이며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했던 현승효 열사가 민주열사로 인정받게 되면서 추모제 참석 차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생긴 사정으로 인해 결국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많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다음 해를 기약할 수밖에….

그리고 1년 3개월이란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다시 노야님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만사를 제쳐놓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또 다시 생활을 핑계로 만남을 미룬다면 이것도 하나의 관성이 되고 말 것 같아서였다.

약속 장소는 제17회 민족민주열사 추모제(16일)가 열리고 있는 광화문의 열린공원이었다. 추모제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현장에 도착했고 거기서 몇 분의 글벗과 함께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일찍이 사진을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역시나 맑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던 옛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제에서.
ⓒ 서태영
아름다운 사람들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은 노야님 한 명이 아니었다. 그 중 한 분은 세계적인 미분기하학자이며 남민전 사건 당시 경북대 수학과 조교수였던 안재구 선생이었다. 선생은 남민전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사형을 구형 받았지만 각계의 구명 노력과 세계 수학자들의 탄원으로 2심에서 무기로 감형된 이후 1999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기까지 무려 14년의 억울한 옥고를 치렀지만 얼굴에는 그늘 없는 온화한 미소가 흘렀다.

선생은 남민전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체포당하고, 일주일 가까이 잠을 재우지 않는 집요한 고문과 심문과정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진 고난의 시간을 담담하게 풀어가기 시작했다. 글로 읽는 것과 말로 듣는 것의 차이일까? 선생의 회고는 그 자리를 함께 했던 십여 명 가슴 속에 무언가 뜨거운 기운을 용솟음치게 하였다.

마지막 휴가를 마치고 '세달 후에 보자!'며 귀대했던 현승효 열사가 시퍼렇게 변한 시신으로 돌아왔지만 '열사병'으로 사망했다는 군의 통보에 망연자실했던 노야님과 현승효 열사께는 신실한 친구가 있었다.

의사로서 친구의 돌연한 죽음에 의심을 품었던 신인식 선생은 자신의 면허를 박탈당하는 등의 곡절을 겪으면서까지 수 십 년간 집요하게 부검의사와 관련기관을 파고들어 결국 현승효 열사가 열사병이 아닌 '독극물(청산가리)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밝혀내고 말았다. 얼마나 친구를 사랑하고 얼마나 정의를 사랑했으면 의사라는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수 십 년간 진실 찾기에 몰두해야 했을까?

현승효. 노야 그리고 ...

▲ 현승효 열사의 영정사진.
ⓒ 이래헌
안락한 장래를 보장받았던 의대 본과 2년생 현승효. 하지만 그의 양심은 유신 독제에 신음하는 민초들의 절규와 암담한 조국의 미래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와 그의 동지들은 의대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학사일정의 파행을 겪으면서까지 반 유신 투쟁의 선봉에 섰지만 유신정권은 그에게 '의대 제적'과 '강제 군 입대'라는 혹독한 보복으로 화답했다.

그 때부터 현승효 열사와 노야님 간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혹독한 훈련의 와중에서 틈틈이 적은 간절한 그리움과 애절한 사연 그리고 그의 인간애는 결국 '3개월 후에 보자'던 약속을 영원히 지키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늦은 밤 인사동의 고풍 창연한 찻집에서 열사와 노야의 길고 애절한 사랑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노야에 의해 공개된 한 묶음의 메모와 편지 그리고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수첩들은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 맑은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글들을 읽으며 청년 현승효의 순수함과 박애 그리고 통찰력과 진실을 느낄 수 있었다.

억울한 죽음은 두 사람의 사랑을 생과 사로 갈라놓았지만 그들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0여 년간 노야는 열사를 가슴에 담았고 열사는 노야의 등대가 되었다. 그리고 한 여인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의 연인까지 포용하게 된 또 한 사람은 바로 노야의 현 남편이었다.

"더 이상 나의 조잡한 글로 이들의 숭고한 사랑을 더럽히지 않으리라!"

억지로 끼워 붙이기

순수한 영혼을 가진 영원한 청년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름다운 사람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믿으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열사의 일기 속에 표현된 훈련과정이나 열사가 묘사한 훈련장의 장면이 내게는 너무도 낯이 익었다. 결국 나는 열사가 근무했던 부대를 알고 말았다. 열사가 고뇌하고 땀과 눈물을 쏟으며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사라진 그 곳은 내가 3년간 땀과 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 부대 바로 그 연병장이었다.

"그래서 그 글을 읽을 때 가슴이 저려왔구나! 그래서 그 사진과 그림을 볼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섬뜩함을 느꼈었구나! 그래서 밤이면 용문산 자락에 숱하게 산화한 억울한 젊은 원혼들의 외침이 바람결에 들려오고, 그들의 흘린 피와 눈물이 실개천에서 내로 강으로 하염없이 흘러 강은 밤마다 아우성을 쳤나 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와 다음에도 게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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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음악 오디오 사진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다양성의 존중, 표현의 자유 억압은 절대 못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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