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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겨울 숲은 비어있다. 나목들 사이로 숲 가장 먼 곳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 봄 숲은 비어 있기에 아기자기 한 것들로 채워질 수 있다. 나뭇가지에 이파리가 올라오면 햇살 한 줌 받을 수 없으니 얼른 꽃부터 피우고 사라진다.

여름 숲은 울창하게 채워진다. 아마도 사계의 숲 중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계절일 것이다. 이맘때면 숲으로 초대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가을 숲은 이른 봄부터 여름까지 그 속내에 품었던 것을 아낌없이 토해내는 계절이다. 겨울을 준비하는 숲, 그들은 모두 놓아버리는 것으로 새 봄 충만한 숲을 준비한다.

숲은 언제나 충만하다. 비어있음으로 또 다른 것이 채워질 수 있음에 충만하고, 충만함으로 자기들만의 세계를 가꿔 가는 것이 숲이다. 언제나 충만한 숲처럼 살고 싶다.

ⓒ 김민수
울창한 이파리들로 가득 채워지면 이른 봄 부터 애써 싹을 틔운 덩굴식물들이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빛을 찾아 하늘로, 하늘로 오른다. 저 깊은 숲 음지에 있는 뿌리를 든든하게 하는 것은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올라온 연한 줄기들이다. 연하디 연한 줄기는 바람 한 줄기에 꺾이기도 하지만 하루 아니면 이틀이면 나뭇가지는 꺾여도 꺾이지 않을 만큼 튼실한 줄기가 되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7월의 숲을 거닐다 차마 숲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누군가 걸어갔던 길을 더듬으며 키보다도 더 큰 풀들을 헤치고 걷는다. 풀이 눕는다. 그 돌아오는 길, 누웠던 풀들이 다시 일어선다.

ⓒ 김민수
앞을 다투어 피던 꽃들의 행렬도 잠시 주춤하고, 꽃이 진 후 맺혀진 열매를 키운다. 그 열매들이 단단하게 익어갈 무렵이면 이제 또 가을꽃들의 행렬이 시작된다. 봄, 가을에 피어나는 꽃들이 가장 많고, 여름에 피어나는 꽃들이 그 뒤를 잇는다. 그리고 겨울에 피어나는 꽃들이 명맥을 유지하며 사계절 내내 꽃 행렬의 바통을 이어간다.

햇살 한 줌 들지 않을 것 같은 음지에서 우거진 숲의 가장자리로 나와 수줍은 듯 핀 세잎종덩굴은 나그네의 안타까운 마음을 위로해 준다. 그 꽃을 보면서 "물에 더럽혀 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시구를 떠올린다.

ⓒ 김민수
종소리가 맑은 이유는 비어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하지 않고 땅을 향하고 있어 은은한 소리를 내어놓는다.
자기 안에 있는 소리를 홀로 독식하지 않는 이유,
아래를 향하고 있어 담아두지 못함이다.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저마다의 소리를 내는 이유,
관철하지 않고 부딪칠 때마다 돌아옴이다.
꽃으로 만든 종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릴까?
꽃망울 맺히는 소리, 터지는 소리, 떨어지는 소리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 바람 소리, 작은 벌들의 날갯짓 소리
공명, 비어 맑은 소리, 종소리가 맑은 이유

(자작시 '세잎종덩굴')


ⓒ 김민수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들도 비에 젖어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잎종덩굴은 비이슬과 어우러져 숲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숲에 들어가려면 나를 끊고 들어가야 한다'고 숲과 인간 사이에 바리게이트를 친 듯 펼쳐진 덩굴, 홀로 있고 싶어 하는 숲의 마음을 담았으되 그 홀로 있음을 방해하려는 이에 대한 배려까지도 하는 것은 아닌지.

꽃 산행 초입에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났던 꽃인지라 지천일 것이라 생각하고 휘적휘적 걸어갔다가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되돌아와야 했던 먼 길,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얻는다.

사람들은 아직 만나지 못한 것들을 만나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것들을 놓아버리는데 익숙하다. 걸어가다 그것이 정말 소중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그 자리에 없다. 후회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인생의 덕목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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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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