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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오자이를 입은 질다가 만토바와 철문을 사이에 두고 부르는 사랑의 아리아. 아시아판 리골레토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 김기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가 새 옷을 갈아입었다. 리골레토는 광대복장 대신에 주방장 옷을, 질다는 고풍스런 드레스가 아닌 아오자이를 입었다. 아오자이는 베트남을 상징하고, 조금 오래된 토픽이지만 그것은 다시 보트피플, 즉 난민을 상징한다. 아오자이가 곧바로 난민의 상징이 된다면야 억지겠으나, 아시아판 리골레토를 통해서 그런 다단계 연상도 허용된다.

지난 27일부터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열리고 있는 오페라 리골레토는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4일까지 계속된다. 베르디 원작 오페라를 등장인물의 이름과 성격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시대상황과 전개요소들을 아시아적 위기로 변환시켰지만, 아쉽게도 관객들은 연출의 의도인 국제 정치 경제적 의미를 크게 보지 못하고 있다.

관객이 연출의 의도나 은유를 곰곰이 따져보기 위해서는 다소 지루한 순간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리골레토는 그럴 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인물간 갈등이나 사건의 진행이 원작의 줄기를 전혀 벗어나지 않고, 대단원을 견인하는 질다의 죽음조차 원작 그대로지만 관객은 생전 처음 대하는 느낌을 가지고 오래된 신작 오페라 리골레토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 1막이 열리면서 등장하는 만토바의 밀실. 당구대와 기묘한 동작의 무용수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 김기

귀족의 신분에서 무기밀매상으로 변신한 만토바는 호색한의 모습 그대로이면서 아시아에 군림하는 매판자본가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만토바의 어릿광대에서 주방장으로 바뀌어진 리골레토의 변화는 특별한 의미를 전달해주지 못했다.

원작에 기대서야 리골레토의 익살을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대관절 요리사가 어떻게 중무장한 무기밀매조직원들과 농담을 주고 받을까 하고 의아해질 것이다.

아쉽게도 리골레토는 이번 작품에서 아시아난민의 대표 상징보다는 불분명한 신분에 다만 죽기에 너무 아까운 딸 질다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한정됐다. 주요 인물의 설정이 다국적자본과 그에 의해 삶의 질곡에 빠진 아시아 난민으로 설정한 애초의 구도는 리골레토 역할의 개연성 부족으로 강한 대비를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원작에도 없고, 이번 작품을 아시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대단히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1막에서 리골레토와 만토바 부하들의 조롱으로 인해 자살한 몬테로네의 딸의 죽음 이후의 역할이다. 일종의 원혼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대사 한 마디 없는 이 역할은 무용수가 맡았다.

▲ 스파라푸칠레의 여관에서 질다는 만토바를 대신해서 죽음을 선택한다. 그때 질다의 죽음에 대해 확정지을 수 없는 아리송한 동작으로 관객의 상상을 자극한 원혼, 몬테로네의 딸
ⓒ 김기

죽음 이후 이 원혼은 만토바와 질다가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에서 안개처럼 슬며시 등장한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놓칠 만큼 희미한 실루엣만으로 표현되다가 질다가 납치된 만토바의 밀실, 질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스파라푸칠레의 여관에서는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복잡한 동작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질다의 죽음과 더불어 리골레토의 비극은 몬테로네의 저주로 인한 것이기에 이 원혼의 동작은 저주의 주술같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이미 몬테로네의 딸을 벗어나 전지적 존재로서 질다와 리골레토를 안타까워하는 관객의 감정이입으로 보이기도 한다.

▲ 질다 김수정과 리골레토 전기홍. 두 사람을 무대 위에서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귀가 호사스러움을 만끽했다.
ⓒ 김기
원혼에 대한 이중적 시각이 가능해진 것은 무엇보다 질다가 보여준 발군의 연기와 노래이다. 총 9회 공연을 하는 이번 리골레토는 세 명의 질다가 출연했다. 김수정, 김정아, 강혜정 등으로 이들이 같은 질다를 연기하면서도 각자 독특한 성격으로 질다 프리즘을 형성하였다. 그런 관객이 얼마나 될 지 알 수 없지만, 사흘을 내리 본 사람이라면 질다 비교만으로도 톡톡한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 일반관객이나 평론가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첫날의 김수정일 것이다. 만토바와 사랑에 빠진 장면에서는 이미 그녀의 불행이 원혼에 의해서 복선이 드러난 상태임에도 짐짓 모른 척 천진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관객을 애간장을 태웠다. 시원한 몸매로 사뿐사뿐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연애에 빠진 연기가 하도 실감이 나서 무대 뒤로 가서 요즘 연애하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기에 그녀의 죽음은 관객의 입장에서 뻔히 알면서도 속고 마는 소위 명작의 올가미에 빠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틀째의 김정아는 가장 원작의 질다 정서에 근접한 모습이었고 질다의 대표 아리아를 부를 때 객석은 침을 삼키지도 못했다. 살얼음을 대하듯이 오히려 듣는 이가 조심스러워질 정도로 맑은 음색을 선보였다., 세 번째 질다 강혜정은 갸날프고 앳된 외모 덕을 톡톡히 봤다. 리골레토는 무엇보다 질다의 죽음에서 모든 것이 결판이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혜정의 열연과 타고난 미모는 관객의 아쉬움을 효과적으로 증폭시켰다.

김수정과 호흡을 맞춘 만토바 이현의 연기와 노래는 그 설정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자본의 오만함과 호색한의 뻔뻔함이 자연스럽고 유효하게 객석에 전달되어 질다의 청순미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이현이 아니었으면 훤칠한 키의 김수정과 사랑의 아리아는 아무래도 어색할 것이었다.

▲ 질다 김정아, 리골레토 장철의 열연
ⓒ 김기

리골레토 역의 전기홍, 장철, 강기우도 앞서 질다의 경우처럼 서로 다른 색깔을 보여주었다. 전기홍은 미성의 바리톤으로 딸에 대한 사랑, 만토바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노래들은 절로 눈을 감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기에 있어 성격 변화가 크게 드러나지 않아 조금 단조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와 반면 장철의 경우는 1막에서는 경박하고 야비한 조직원들과 혼연일체된 모습과 딸을 걱정하는 이중적 성격묘사에 탁월했다. 그리고 3막에서 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오열하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배우는 가장 후배 격인 강기우이다. 강기우는 자신이 출연하는 날은 물론이거니와 그렇지 않은 날도 빼놓지 않고 객석에 앉아 선배들의 연기를 지켜봤다. 큰 키에 임펙트 강하면서도 미성을 소유한 강기우의 무대 위 연기와 노래도 인상적이었지만 매일 객석에 앉아 선배들을 목청껏 격려도 하고, 자신 스스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모습은 후일 선배들을 뛰어넘는 배우를 짐작케 해주었다.

리골레토에 대한 오페라 연출가 장수동의 과격한 해석은 두말 할 것 없이 성공적이다. 리골레토에 대한 총평은 “역시 한국사람은 노래를 잘한다”이다. 그랜드 오페라쯤 되어야 관객도 더 몰리는 밴드웨곤 현상이 문화계를 지배하지만, 역시 오페라 아리아를 씨디가 아닌 현장에서 듣는 맛은 확성없는 자연음성 그대로일 때 제격이다.

7백석 토월극장에서 가수들의 소리를 그대로 듣는 느낌은 씨디나 혹은 대형 공연장에서 스피커를 통해 듣는 세계 최고의 성악가들의 노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소리이고, 과장 없는 그 사람 그대로의 소리이기에 그렇다. 장수동 감독이 소극장 오페라만 하는 것은 아지지만, 그래도 소극장 오페라운동의 구심점인 그이기에 향후 그가 시도할 작은 오페라에 관심이 끌린다.

▲ 남성 관객의 입장에서 세 명의 질다 중 가장 안타까웠을 강혜정 질다의 죽음. 그리고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미래의 기대주 강기우 리골레토
ⓒ 김기

공자의 말씀 중에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이 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라는 뜻인데, 통속적으로 사는 입장에서 도를 운운할 수는 없겠으나 장수동 오페라 리골레토는 그 말이 머리 속에 떠올려질 만큼 의미와 재미를 주었다.

그러나 대본상 인물 성격의 완성도와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한 개연성 확보, 리얼리티에 역행한 안무의 논리 등등 지적된 숙제들이 있다. 올 11월 중국 상해에 가서는 국내 무대보다는 비교적 비우호적인 시선들이 존재하기에 그전까지 더 치열한 분석과 수정작업을 통해 한결 높은 완성도를 갖춰주기 바란다.

기왕에 아오자이를 입은 질다라면 그 이름도 아사아의 이름으로 바꾼 좀더 본격적인 번안을 시도해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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