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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승부였다. 아마 이런 승부는 그의 일생을 통해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담천의는 여섯 시진을 편안한 마음으로 운기조식을 하며 보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을 되새김질하면서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던 염화심력의 기운을 몸으로 느껴보려 했다.

내력을 바탕으로 전해지는 무형의 기운은 공기를 가르고 다가온다. 엄밀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기운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허나 염화심력은 다르다. 그것은 다가오는 기운의 존재도 느낄 수 없다. 단지 몸에 가해지는 충격만으로 그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고수라면 방안에 앉아서 무형의 진기로 방문을 밀어 열 수가 있다. 내력을 운용해 발출함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몸에서 발출된 진기가 허공을 타고 문을 밀어 열게 된다. 하지만 염력은 다르다. 진기가 허공을 가르고 기운이 전달되는 것이 아닌 문 자체가 움직임으로서 문이 열리는 것이다. 결과는 같지만 그 과정은 전혀 다르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내력은 반응만 빠르다면 피하거나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염력은 막거나 피할 방도가 없다. 두 번을 경험해 보았지만 타개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염력이 정신력인 만큼 정신력으로 버티면 될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경험한 두 번 모두 그는 자신의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염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그 길을 간 인물이다. 그 능력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개발한 인물이다. 단 한발도 나아가 본 적이 없는 담천의가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강인한 인내심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을 지도 모른다. 허나 버틴다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상대가 염화심력을 펼치기 전에 속전속결을 해야 하는 것일까?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으면서 기회를 노려야 하는 것일까? 어느 것도 완전치 않았다. 서두름은 승부에 있어 가장 피해야 할 금기다. 그렇다고 마냥 참는 것은 기운을 소모해 정작 기회가 왔을 때 움직이지도 못할 수 있다.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다시 되새김질해도 완벽한 해결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모든 것이 몸 속의 진기의 운용이지 정신력의 운용은 아니었다.

"……!"

담천의는 연동에 들어오면서 상엽사형제, 그리고 광와(狂蛙)와 후송(朽松)노인을 만났던 지하광장을 지나면서 새로운 감회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아득한 과거와 같은 느낌이었다. 천동의 연무장은 그곳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보였다.

석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연무장 중앙에 허리 높이로 사방 십장 정도의 넓이로 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벌써 이십여 명 정도의 인물들이 앉아있었다. 담천의 일행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자 유항이 직접 나서 맞은편으로 안내했다.

"또다시 뵙게 되는군요."

유항이 눈에 살기도, 그렇다고 놀리는 것도 아닌 기묘한 눈웃음을 지으며 담천의에게 인사했다. 한편으로는 안됐다는 표정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전과 같은 차나 술을 대접한다면 거절하겠소."

여유 있는 대답이었다. 그런 곤욕을 치르게 한 여자에게 아무런 내색 없이 대답을 하는 담천의를 보며 유항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너무나 침착하고 여유가 있었다. 일생일대의 승부를 앞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침착함이었다. 오히려 담천의를 따라온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과 초조함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샐쭉 눈을 흘기며 의식적인지 모르지만 남궁산산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담천의와 남궁산산의 관계를 아는 유일한 여자였다. 허나 그녀는 움찔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남궁산산의 눈빛은 더 이상 사나워질 수 없을 정도로 표독하게 변해있었다. 하시라도 손이 나올 것 같은 모습이어서 유항은 담천의 일행이 자리에 어느 정도 착석하자 가볍게 예를 취하더니 몸을 돌렸다.

승부에 앞서 남궁산산과 불상사가 생긴다면 자칫 이곳 안에서 승부도 하기 전에 패싸움이 날 수도 있었다. 남궁산산이 손을 썼을 때 자연 자신이 반격을 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가 그 싸움에 끼어든다면 서로 손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맞은 편 쪽으로 돌아가던 유항은 다시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는 몇 사람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바로 섭장천 일행이었다.

"유항이 섭노야를 뵈옵니다."

유항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섭장천의 존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아무리 다른 길을 걷는다 해도 존장에 대한 예의는 잃지 않았다. 그만큼 섭장천의 훈육은 엄격했고, 직계 스승이 아니라 해도 섭장천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묵직한 중압감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자리는 마련해 두었느냐?"

섭장천은 뭔가 말을 하려다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떡이며 물었다.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을 테지만 참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당황스런 기색을 띄우더니 다시 장철궁과 백결에게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대답했다.

"준비하겠사옵니다."

준비해 두었을 리 없었다. 섭노야야 참관인으로 초대를 했으니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듯 사형제 모두 버젓이 나타날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철궁과 백결, 그리고 등자후가 섭노야를 모시고 온 이상 어느 곳이라도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는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사형제요, 스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백하게 적이었고, 누구보다도 껄끄러운 상대였다. 장철궁과 백결의 냉랭한 시선을 느끼면서 그녀는 황급히 자신의 일행이 있는 쪽으로 눈짓을 했다.

그러자 몇 명이 일어나 한쪽 구석에 치워져 있던 탁자와 의자를 순식간에 가져와 그들과 제마척사맹의 중간 지점에 가져다 놓았다. 유항이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다 결국 입술을 떼지 못한 채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자신의 본래 위치로 걸어갔다.

담천의는 텅 빈 대 위를 바라보았다. 저곳이었다. 이제 저곳에서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정해질 것이다. 잠시 후면 자신과 방백린이란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물들도 역시 상대 쪽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담천의와 같이 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대군을 비롯한 절대구마의 후인들, 그리고 우상과 좌상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담천의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담천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떼지 않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사람이야… 어떻게 운명은 이리도 공교롭게 겹쳐지는 것일까?)

모습이 변했다. 4년 전과는 달리 음울한 눈빛과 냉소적인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아직 사내의 고독한 눈빛은 여전했다. 두려움을 가지고 사내를 쳐다보았던 그 때. 피가 묻은 검으로 자신의 목에 댔다가 그녀의 눈빛에 망설였던 사내.

그리고는 고개를 흔들며 검을 치우고 떠나가던 사내. 그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눈빛은 잊을 수 없었다.

'그 사내가 분명해요. 누나.'

운령의 곁에는 아직 앳되어 청년이 서있었다. 창백한 낯빛에 걸친 장포가 오히려 헐렁해 보일 정도로 작고 마른 체격이었다. 당새아가 여전히 운령 곁에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당새아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동생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동생이 자신의 손에 쓴 글이었다.

'얄궂은 운명이구나.'
'우리는 그에게 갚을 빚이 있어요.'
'너는 이미 알고 있었느냐?'
'아니오. 몰랐지만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 우리와 악연(惡緣)이 있는 사람임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빚 아닌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오히려 잘 된 일이죠. 또한 나는 누나의 약속대로 저 사내에게 빚을 갚을 수 있게 될 거예요.'

허나 운령은 시선은 여전히 담천의에게 고정한 채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직 네가 방백린이란 사람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는 알면 알수록 무서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누님은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어요. 저 사람이 얼마만큼 해줄지 모르지만 나는 최소한 반쪽을 책임질 수 있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확실히 자신은 동생을 모르고 있었다. 동생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체질은 자신과 같았다. 그럼에도 동생은 단호한 태도다. 동생은 결코 자신 없는 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다.

자신의 동생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 그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일까? 할아버지는 무슨 연유로 이 위험한 곳에 이 아이를 보낸 것일까? 무인들의 승부에서 두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혹시 이 아이가…?)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바라보다가 다시 담천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동생이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자 그녀는 내심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있었다.

(제 99 장 完)

덧붙이는 글 | 소주 한 잔할 장소와 일시를 공고합니다. 
5월 마지막 주로 정하려 하다가 모두 바쁘실 것 같아 조금 앞당겼습니다. 미국에 있는 분 중 운 좋게 한국에 나오셔서 참석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계셨고, 다음날 부담도 없을 것 같아 금요일로 잡았습니다. 

일시 : 5월 26일(금) 오후 7:00시 
장소 : 광화문 뒷골목 밥상머리 2층(세종문화회관 뒷편 : TEL 02-723-0288)

이십여 분 정도가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메일을 주셨습니다. 오히려 외국에 나가 계시는 분들이 메일주시며 참석하지 못해 서운하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동안 저에게 메일을 주시며 격려하셨던 분들이나 댓글로 성원해 주셨던 분들, 날카롭게 비판하셨던 분들이 모두 참석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그 동안 조용히 그리고 꾸준하게 읽으셨던 분들도 이번 기회에 한 번 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편하게 나오셔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자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은 없습니다. 흉금 없이 제가 보지 못한 시각에서 본 <단장기>에 대한 평도 듣고 싶은 마음입니다. 물론 메일이나 답글을 주시지 않고 참석하셔도 무방합니다. 

비용은 그 동안 오마이뉴스에서 단장기를 연재하면서 받은 원고료와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셔 주셨던 ‘좋은 기사 원고료’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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