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뛰어난 지략가를 두어라

▲ 작가 신봉승 대하역사소설 <난세의 칼>
ⓒ 선
정치를 하려면 사람을 얻어야 한다. 역사의 큰 인물 뒤에는 항상 뛰어난 지략가가 있다. 유방의 장자방처럼,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손권에게는 주유가 조조에게는 순욱이 있었다." -'책 뒤에' 몇 토막

오는 5월 31일 열릴 예정인 지방선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벌써부터 각 정당의 지역후보 공천을 받기 위한 예비후보들의 신경전이 날카롭게 벌어지고 있다. 요즈음 선거는 후보 공천에 따른 당원들의 투표에 이어 다시 각 정당에서 뽑힌 후보들과의 치열한 표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점에서 선거를 두 번 치르는 셈이다.

하지만 어쩌다 한번(자의든 타의든)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투표를 세 번 네 번 치른다고 해서 결코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다. 또 선거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표가 적게 나왔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지도 않는다. 그들은 지난 번 낙선의 원인을 더듬으며 다음 선거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발로 뛴다.

그런데도 어떤 후보는 선거에 나올 때마다 보란 듯이 당선이 되고, 어떤 후보는 선거에 수없이 나왔지만 몇 백 표 차이로 아깝게 떨어지기도 한다. 물론 지역정서에 따른 정당의 선택도 중요하다. 또 얼마나 발로 많이 뛰었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뛰어난 지략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명회의 삶, 다시 한번 꼼꼼하게 되돌이켜 볼 때

"한명회의 일대기는 가장 불우했던 인간이 가장 화려한 삶을 만들어가는 '입지전'의 전형이면서도 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훈훈한 교훈과 넉넉한 가르침을 준다. 이제 서기 몇 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식의 역사소설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야 할 때다." -'작가의 말' 몇 토막

지난 해 3월, 문학으로 읽는 조선왕조사 <조선의 마음>을 펴낸 작가 신봉승(73)이 조선시대 화려하고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칠삭동이 한명회의 삶을 꼼꼼하게 되짚은 대하역사소설 <난세의 칼>(모두 5권, 도서출판 선)을 펴냈다.

이 책은 지난 1992년에 <한명회>(모두 7권)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와 1993년 KBS 2TV에서 드라마 '한명회'로 방영된 내용을 이번에 5권으로 줄여 새롭게 묶었다. 제1권 '운명의 만남', 제2권 '살생부', 제3권 '왕위 찬탈', 제4권 '고운 님 여의옵고', 제5권 '부관참시'가 그것.

작가 신봉승은 '작가의 말'에서 <한명회>를 다시 손질하여 <난세의 칼>이란 이름으로 14년 만에 다시 내게 된 이유에 대해 "지금이야말로 '역사인식'을 짚어가야 할 때"라고 꼬집는다. 이어 "난세가 되면 하늘은 호걸을 소명하여 부리지만, 그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믿으면 가차 없이 버린다"라는 명구를 통해 현 정치권에 묘한 여운을 남긴다.

"살생에 대한 원한은 언제나 시련이 되어 돌아온다"

나룻배 한 척이 강을 건너고 있다. 아직은 뺨에 시린 강바람을 가르며 물살을 헤치는 나룻배에는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삐거덕삐거덕 노 젓는 소리가 왠지 무겁게 들린다. 그게 마치 그 덩치 때문이기나 한 듯 우람한 몸짓의 사나이도 끼어 있다. 그는 아까부터 쉼 없이 떠들어대고 있는 한 사내를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켜보고 있다.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서 떠벌리고 있는 사내는 풀잎을 지근지근 씹어 가며, 그 풀물을 퉤, 퉤, 뱉으면서 한창 신바람이 나 있다. 드물게 볼 정도로 못 생긴 얼굴이 어찌 보면 당나귀와 흡사했다. 그러나 눈빛은 형형하여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서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요모조모 눈여겨 살폈을 때의 인상이고, 언뜻 보기엔 영락없는 팔푼이 아니면 덜떨어진 망나니였다.

-제1권 '운명의 만남' 10~11쪽


'계유정란'이라는 피바람을 일으키며 나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수양대군을 임금의 자리에 반듯하게 올려놓은 지지리도 못난 칠삭동이 한명회. 세조가 '공은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부를 만큼 아끼고 또 아꼈던 한명회는 과연 뛰어난 지략가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쫓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모리배였을까?

역사의 그늘에 묻힌 진실을 캐는 작가
작가 신봉승은 누구인가?

▲ 작가 신봉승
ⓒ선
"임금과 신하가 동반자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여 성공한 예가 있다면 세조와 한명회의 관계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세조는 임금이 되기 전인 수양대군 시절에 한명회라는 걸출한 막료를 거느릴 수가 있었기에 '계유정란'이라는 피바람을 일으키며,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파란만장을 넘어설 수기 있었다." -'작가의 말' 몇 토막

작가 신봉승은 1933년 강릉에서 태어나 1957년 <현대문학>에 시 '이슬'을, 1961년 같은 문예지에 문학평론 '현대시의 생성과 이해'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초당동 소나무 떼><초당동 아라리>가 있으며, 장편역사소설로는 <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48권) <소설 한명회>(7권) <왕건>(3권) <조선의 정쟁>(5권) <이동인의 나라>(3권)가 있다.

그밖에 <직언><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양식과 오만><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학생부군과 백수건달><성공한 왕 실패한 왕><시인 연산군> 등의 역사에세이와 < TV드라마 시나리오 창작의 갈라잡이>를 펴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거쳐 지금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추계예술대학> 영상문예대학원 대우교수로 있다.
/ 이종찬 기자
이에 대해 작가 신봉승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사람에게는 위기가 따르게 마련"이라며, "살생에 대한 원한은 언제나 시련이 되어 돌아온다"고 말한다. 즉, 세조를 밀어내려는 음모가 끊임없이 되풀이 된 것은 세조의 손을 떠났던 원한의 화살이 세조를 향해 되돌아온 것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한명회는 뛰어난 지략으로 세조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또한 그 때문에 세조는 한명회에게 엄청난 정치권력을 내준다. 말 그대로 한명회가 원하는 자리라면 뭣이든 마다 않고 맡겼던 것이다. 세조가 한명회와 사돈이 되기 위해 그의 딸을 며느리로 맞은 것도 다음 대의 왕비를 보장해 줌으로써 한명회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수양대군은 여의주 없는 용이요, 한명회는 여의주였다

무척 길었던 밤이다. 또 피를 말리는 밤이기도 했다. 수양대군이 소년 단종을 위협하고 다독이며, 동석한 중신들에게 수습의 의지를 밝히고 있을 때 한명회는 시어소의 내정을 서성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결단을 미루는 것은 해악'이라고 믿고 있는 한명회다. 자신의 결단으로 조정의 안위를 지켜 갈 수 있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은 없다. 그러나 한명회는 죄책감에 젖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설혹 그가 피바람 소용돌이쳤던 쿠데타를 획책한 주역이었고, 수양대군의 둘도 없는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하더라도 정작 요직에 발탁될 처지는 아니다. 또 그것을 바라고 일을 저지른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수양대군의 곁을 떠날 처지도 아니질 않은가.

-제2권, '살생부' 335쪽


한명회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온 문열공 한상질의 손자로 태어났다. 한명회는 일찍 부모를 여읜 탓에 몹시 가난하게 살았지만 늘 책과 씨름한 끝에 역사 인식이 남달랐다. 백수건달 한명회가 37세 때 문종의 뒤를 이어 12살의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수양대군이 위기에 몰린다.

그 당시 수양대군이 여의주 없는 용이었다면 한명회는 그 용의 입에 물려줄 여의주였다.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렇게 만난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마침내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뺏는다. 하지만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단종을 복원시키려는 충신들의 저항 또한 그리 만만치는 않다.

그때 한명회는 세조에게 노산군으로 폐위되어 강원도 영월 땅에 유배를 간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게 만든다. 단종이 그렇게 죽고 나자 모든 정치권력을 한 손에 쥔 세조와 한명회는 사돈을 맺음으로써 태평성월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조의 아들과 한명회의 딸은 모두 타고난 숙명처럼 스무 살을 앞 뒤로 죽게 된다.

이에 대해 작가 신봉승은 "이들이 지은 원한을 하늘이 갚았다"라며, 그 뒤부터 한명회는 "명리를 멀리 했어도 지위는 언제나 권부의 핵심에 있었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어도 가산은 늘어만 갔다"라고 말한다. 정치권력의 속성이 한명회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끝내 탄핵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는 것이다.

▲ 1992년 처음 낸 역사소설 <한명회>를 5권으로 고쳐 묶었다
ⓒ 이종찬
죽고 나서도 또 한번 죽은 사내 '한명회'

그의 길쭉한 당나귀 상에서 웃음이 가신 지는 이미 오래였지만, 실상 그의 시름은 다른 곳에 있다./ 휘영청 달이 밝다. 한가위를 이틀 앞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은 들떠 가고 있었으나, 달을 보고 있는 한명회는 시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폐비 윤씨가 사가에 유폐된 지도 어언 3년, 폐비의 핏줄인 원자는 자라서 이미 일곱살이 되었다. 별다른 액운이 없다면 원자가 보위를 이어갈 것은 정한 이치다. 그때까지 폐비 윤씨가 살아만 있어 준다면 폐비로 인한 피바람을 피해갈 수가 있다.

'삼가야 했던 것을...'

-제5권, '부관참시' 324쪽


문종으로부터 단종, 세조, 예조, 성종으로 이어지는 5대에 걸친 격동의 시대를 한 손에 쥐락펴락 했던 한명회! 그 천하의 한명회도 결국 두 번 죽는다. 첫 번째 죽음은 73세의 나이로 병석에 누워 눈을 감았던 때요, 두 번째 죽음은 연산군 때 그의 무덤을 파서 그 뼈에 칼질을 당하는 이른바 '부관참시'였다.

이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권력을 강제로 빼앗은 사람은 육신의 고통을 끝내는 것, 즉 죽음으로서도 끝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천재도 준재도 범재도 자신이 만든 운명의 축척이듯이, 한명회의 삶은 그와 같은 하늘의 이치를 유감없이 보여준 삶", 아무도 그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업(業)을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 신봉승은 죽어서도 위세 당당했던 한명회의 '영의정상당부원군청주한공명회지묘'라는 비석이 뽑히고 부관참시 당하는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빗물에 씻겨진 한명회의 하얀 뼈는 비에 젖은 병사들에 의해 토막이 쳐지고 있다./ 아득히 멀어 보이는 산자락 너머에서 우르르르 천둥소리가 들린다. 병사들에게는 그 소리가 칠삭둥이 한명회의 울음소리로 들린다"라고.

한명회의 삶과 정치철학을 꼼꼼하게 그려낸 <난세의 칼>은 철저한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200여 명의 실존 인물들을 통해 한 시대 역사의 진실을 사실 그대로 그려낸 대하역사소설이다. 이 책은 어느 누구보다도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칼끝에 묻힌 핏빛 원한은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되새겨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뉴스',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


난세의 칼 1 - 운명의 만남

신봉승 지음, 선(2006)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