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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자연스럽게 흑인이 떠오른다. 아프리카를 고향에 둔 흑인들, 그들을 두고 노예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것이 곧 전체가 되는 건 아니다. 기억하기 싫은 것뿐이지 사실 역사 속의 노예들 중에는 황인종도 있었다. 또한 잊혀졌을 뿐이지, 백인도 있었다.

백인이 노예라는 건 다소 뜻밖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일까. 모로코 등 이슬람 세력에 의해 백인들이 노예가 되어 절망했었던 시대를 파헤친 <화이트 골드>는 선뜻 믿겨지지 않는다. 세계의 지역들이 서로 교류하던 시절만 해도 노예라고 하면 아프리카에 몸을 둔 흑인들만 떠오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이다. 1700년 경 전후 백인들은 해적선에 잡혀 아프리카로 팔려가지 않을까 걱정돼 몸을 떨어야 했다. 또한 잡혀간 백인들이 노예 생활로 죽어간다는 것을 알아도 힘이 약한 탓에 저항은커녕 항의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좀 더 자세히 그 시대를 들여다보자. 그 시대의 모로코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물라이 이스마일 술탄이 지배하던 때였다. 또한 해적선들이 노골적으로 유럽의 배들을 잡아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백인은 확실한 금전을 보상받을 수 있는 가치를 지녔다. 그런 탓에 유럽의 연안 지역을 침범하기도 했다. 백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돈이 많아지니 말이다.

특별히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닌 백인 노예들이 값어치 있게 다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 사상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 노예가 된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나서서 돈을 물어주고 노예가 된 백인을 사온 것이다. 물론 유럽이 군사력이 막강하다면야 그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칠 필요는 없었을 테지만 그 당시만 해도 유럽은 그렇지가 못했다.

자신들의 혼란한 국내 상황을 감당하는 것도 벅찬 그들은 이스마일의 비유를 맞추며 조금이라도 싼 값을 물려고 노력할 따름이었다. <화이트 골드>가 파헤친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흑인들을 노예로 사용하기 위해 유럽에 데려오면서도 백인들이 노예가 되는 것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죄악이라고 흥분하지만, 군사력이 부족해 전전긍긍하던 유럽인들이 아직 세계의 변방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시대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화이트 골드>는 토머스 펠러우라는 열한 살 소년과 함께 시대 속으로 걸음을 재촉해 들어간다. 펠로우는 누구인가? 1716년 선원 51명과 함께 해적들에게 사로잡힌 백인 노예다. 펠로우는 그때부터 갖은 고초를 겪는다. 갖은 고초란 무엇인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슬람의 지배자들이 백인 노예들을 학대하는 그것인데 실상 <화이트 골드>의 대부분은 그런 내용으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다.

'악의 제국'에 대한 폭로라고 해야 할까? 이스마일이 얼마나 잔악하고, 야비하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쯤 되면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생긴다. 그토록 잔악했다면 역사에 기록될 법도 한데 어째서 잊혀졌을까 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스마일이 죽고 등장한 후계자들이 약했기 때문에 구도가 급격하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백인들의 노예 생활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는다.

백인 노예 매매는 시디 무하마드가 1757년 술탄이 되면서 종말을 맞이한다. 새로운 술탄은 세계가 평화적으로 살기를 바랐고 서로 협력하기를 꿈꿨다. 그래서 해적선들을 막고 우호적인 관계를 쌓으려고 노력한다. 그럼 이것 때문에 백인 노예 매매가 끝났을까?

아니다. 새로운 술탄이 이렇게 노력하는 사이 노예 생활을 했던 펠로우의 후손이 주도한 유럽의 '공격'으로 끝난다. 노예 매매 근거지에 성한 건물이 하나 없을 정도로 폭탄 세례를 퍼붓고서야 끝장을 본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끝이 이러한 탓인지 <화이트 골드>의 뒷맛은 개운치가 않다. 사실 지은이는 그 시대 유럽에는 아직 흑인을 인간으로 보는 사상이 없었다며 세상이 기억하는 흑인 노예들의 처참한 상황과 설움, 그리고 고통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백인 노예들의 것이다. 더욱이 백인을 노예로 다룬 이슬람을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사탄의 세력처럼 그린 것도 의아스럽다.

인간을 학대한 것은 물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노예'를 다뤄서 나쁜 것이 아니라 '백인'을 노예로 다뤄서 나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책의 의도가 다소 의심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 의심하겠는가.

오히려 이렇게 보자. <화이트 골드>에서 백인들이 받은 이러한 고통 이상으로 흑인들은 그 몇 십 배의 시간 동안 엄청난 고통을 받았으니 미안한 마음을 갖자는 의도라고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화이트 골드>는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 동원한 방대한 자료와 현실감 있는 글 솜씨 등 여러모로 괜찮은 논픽션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화이트 골드>는 백인들을 위한, 백인들만의 대서사시가 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화이트 골드 - 이슬람 제국의 '새하얀 금' 백인 노예들의 잊혀진 이야기

가일스 밀턴 지음, 이충섭 옮김, 생각의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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