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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전문 철학서를 읽으면서 '철학자들은 삶의 단면들을 왜 이렇게 추상적이고 어렵게 다룰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철학 그 본연의 학문적인 탐구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난해와 용어와 이론 때문이겠지만, 결국 삶의 진실을 알뜰하게 밝혀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좀 더 쉽게 쓰여져 독자들에게 다가갔으면 했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이런 바람을 충분히 만족시켜 준다. 저자는 이미 <철학풀이 철학살이(민음사)> <소설 속의 철학(문학과 지성사)> <쾌락의 옹호(문학과 지성사)> 등의 저서를 통해 철학이 얼마나 우리 삶과 밀접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철학이 추상적이고 난해한 학문의 영역에서 얼마든지 우리 삶의 주변으로 내려올 수 있는지를 문화의 갈래를 넘다들면서 잘 보여주었다.

▲ 책의 겉표지
ⓒ 효형출판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도 이런 맥락에서 멀지 않은 저서이다. 이번에는 영화 속에서 철학의 단면들을 찾아내고 난해한 철학 이론들을 영화와 관련시켜 쉽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와 철학을 가로지르기

고금의 뛰어난 철학자들과 난해한 철학 이론들이 <철학, 영화 캐스팅하다>에서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트루먼 쇼>를 통해 들뢰즈의 '노마드'(nomad, 일자 중심의 근원성과 이원대립적인 흑백논리를 거부하는 일종의 차이와 타자를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의 개념을, <슈렉>이라는 영화를 통해서는 보이는 것 너머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칸트의 '숭고함'을 풀어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일급 철학자들의 난해한 이론들이 마치 영화 속의 장면과 이야기들 속에서 술술 풀어져 나온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철학적 탐구>의 '언어 놀이'라는 개념을 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여인의 향기>의 두 주인공 프랭크와 찰리의 관계 설정을 통해 풀어낸다.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을 아주 간명하게 드러낸다.

"요컨대 언어 놀이에서의 쓰임새가 곧 그 언어의 의미다. 그러므로 의미는 그 게임이 이뤄지는 방식에 따라 다채롭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언어 게임이 중요해진다. 그것은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으며, 그 규칙은 게임이 참여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p308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트릭스>

<매트릭스>를 통해 철학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한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개념을 알기 쉽게 전달한다. 샤르트르의 실존적 인간의 개념을 네오를 비롯한 진짜 인간과 스미스를 비롯한 가짜 인간들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첨예하게 드러낸다.

매트릭스라는 세계는 가짜가 모든 현실을 장악하여 통제하는 곳으로 여기에서는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거의 의미가 없다. 즉 가짜가 진짜를 지배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환상이 현실로 다가옴을 암시하는 무서운 세상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세상에서 진짜를 구하기 위해 모피어스와 네오가 힘을 합쳐 가짜들의 음모에 맞서고 진짜들을 모두 구출하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가짜인간들을 본질이 우선하는 즉자존재로, 모피어스와 네오를 실존이 우선하는 대자존재로 관계 지운다. 즉 즉자존재는 본질이 먼저 있고 존재가 그것에 맞춰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규정되고 획일화된 것이고, 대자존재는 저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선택의 자유를 가진 것으로 관계 지운다. 곧 실존 혹은 존재가 먼저이고 본질은 그 다음인 것이다.

"인간 복제가 목전의 현실로 다가온 지금, 어쩌면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가 부딪쳐야 할 실제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어떤 것이든 진짜 인간의 기준은 변함없는 것이니, 우리는 그런 기준으로 가짜 인간과 진짜 인간을 구분한다. 그것은 선택, 믿음, 사랑을 통해 자신을 어떤 존재로 만들어 가며 실존하는 대자존재이다." (p81에서)


요컨대 영화는 금세기 가장 화려한 문화의 한 영역이자 자본주의가 나은 가장 생산력 있는 매체이다. 하지만 철학은 인문학적인 고고함과 그 역사적 찬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중들로부터는 먼 거리에 놓여져 있다. 저자는 이런 거리를 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아주 가깝고도 간명하게 당겨 놓는다.

갈래를 넘나드는 글읽기와 글쓰기

저자 이왕주 교수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실제 이전 저서들에서 문화의 하위 갈래를 넘나드는 실험과 글쓰기를 진행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철학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전달하기보다 먹고 사는 가시적인 삶에서 찾고 그 의미의 모습을 궁구해 가는 실제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면들을 질감 있게 전달해 왔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도 이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전의 저서인 <소설 속의 철학>에서 드러나던 초심의 긴장감과 팽팽한 맛이 떨어지는 것이 다소 아쉽다. 하지만 전작이 소설을 통해 철학을 이야기했다면, 이 책은 영화를 통해 철학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분명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갈래를 넘나든다는 것은 곧 문화의 하위 갈래들의 차이와 상대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을 십분 글쓰기와 글읽기에 활용했다. 특히 독자들에게 다가서기 어려운 철학이라는 영역을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또 다른 후속 작품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효형출판(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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