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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 칼라의 성문, 오른쪽으로 칼타 미나레트가 보인다.
ⓒ 김준희
부하라에서 히바로 가는 방법은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오던 방법과 같았다. 합승택시를 이용하는 것이다. 부하라 외곽의 캬라반 바자르 앞은 언제나 택시와 미니 버스들이 많이 늘어서 있는 터미널이다. 이곳에서 히바로 가는 합승택시를 타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다만 부하라에서 히바까지는 약 500km가 되는 먼 거리이기 때문에 비용도 그만큼 비싸진다. 3명이 넥시아를 탈 경우에 1명당 25달러씩을 내야 한단다. 아침 10시 전에 이곳에 도착한 나는 히바로 가는 택시를 고르고 흥정도 끝냈지만, 다른 승객이 올 때까지 택시의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 혼자서 택시 한 대의 비용을 지불한다면 기다릴 필요없이 바로 출발할 수 있겠지만, 여행자가 그런 객기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에어컨 없는 택시에 앉아서, 부하라의 뜨거운 뙤약볕 속에서 합승을 할 다른 승객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시간은 돈'이라고 하던데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콧수염을 기르고 배가 나온 운전사의 이름은 '슬롬'이라고 한다. 슬롬은 혼자 기다리고 있는 내가 신경쓰였는지 곧 다른 승객이 올 거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 터미널에는 많은 택시와 미니버스들이 있었다. 택시는 대우의 티코와 넥시아가 많았고, 미니버스는 역시 대우의 다마스를 포함해서 많은 외제차들이 있었다.

터미널의 뒤가 캬라반 바자르라서 그런지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먼거리를 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물과 음료수를 파는 상인들, 전통빵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들과 호객을 하는 운전사들로 정신이 없는 곳이다. 슬롬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이제 곧 두 사람이 더 올 거라고 말했다.

좀 덥기는 하지만 이곳에 앉아서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지루한 일이지만, 혼자서 여행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금처럼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려야 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상대방이 내 뜻을 이해하길 기다려야 하고, 혼자 보내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30분쯤 지나자 히바로 가는 두 사람이 도착했다. 이제 히바로 출발이다. 함께 탄 아저씨 중 한 명은 붉은 셔츠에 금니가 인상적인, 그 또래의 우즈벡 아저씨들과는 달리 날씬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꽤나 멋을 내고 다녔을 것 같은 이 아저씨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의 여권을 보여주고 나이를 알려 주면서 내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하면, 자신이 사냥으로 짐승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나보다 10살이 많은 이 아저씨는 영어와 한국어를 못하고, 나는 우즈벡어와 러시아어를 모른다. 그런데도 택시를 타고 가면서 서로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 만하다.

▲ 히바로 가는 길. 도로의 양옆은 사막이다.
ⓒ 김준희
부하라에서 히바까지는 뻥 뚫린 포장도로이고 도로의 양옆은 사막뿐이다. 금니 아저씨는 연신 나에게 말을 걸어서 왼쪽으로 보이는 사막과 그 너머는 투르크메니스탄 영토라고 알려 주는가 하면, 유목 생활을 하는 카작 민족이 보이면 그들의 전통가옥인 유르따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왼쪽으로 보이는 사막은 카라쿰 사막이다.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사막은 '검은 모래'라는 의미라고 한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 차에서 본 이 사막은 흔히 사막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고운 모래 사막이 아니다. 군데군데 마른 풀들이 솟아 있는 황량한 지형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사막은 '붉은 모래'라는 뜻의 키질쿰 사막이다. 양쪽의 사막 모두 삭막하기만 하다. 보이는 거라고는 황토색 벌판과 듬성듬성 나있는 풀들, 햇볕을 받아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뿐이다. 인간의 손길이 이 사막 어딘가에 미쳤을 거라고 짐작되는 건 보이지 않았다. 이 사막 어딘가는 아직 인간이 한번도 발을 디디지 않은 곳도 있을것이다.

금니 아저씨가 다시 날 불렀다.

"준!"

난 뒤를 돌아보았다.

"왜요?"
"아무다리야! 아무다리야!"

아저씨는 왼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곳에는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큰 강인 아무다리야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 너머로는 역시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아무다리야 강은 아랄해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예전에 아랄해로 흘러드는 물줄기 중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강이 바로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이었다.

하지만 목화 경작을 위해서 이 두 개의 강줄기를 강제로 돌려 버리는 바람에 아랄해는 재난을 맞이하게 됐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강이 바로 그 아무다리야 강이다. 이 강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강제로 물줄기를 틀었기 때문에 아랄해로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면 이 강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히바를 여행하고 난 다음에는 아랄해를 보러갈 계획이다. 하지만 이건 계획뿐이고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오늘 히바에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주일 후의 일을 알수 있으랴.

한참을 달리던 차는 밥을 먹기 위해서 한 식당에서 멈추었다. 우즈베키스탄식 짬뽕이라고 불리우는 라그만과 빵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금니 아저씨는 나에게 계속 맥주를 권하고 잔을 채워 주고 빵과 샐러드가 더 필요하지 않냐고 챙겨 주었다. 그리고 떠날 때가 되어서는 내가 먹은 음식과 맥주 값까지 계산해 주었다. 정말 멋진 아저씨다.

▲ 점심으로 먹은 라그만과 전통빵
ⓒ 김준희
히바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의 이중 성벽으로 구성된 곳이다. 이중에서 볼거리들은 '이찬 칼라'라는 이름의 내성 안쪽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히바에 오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 이찬 칼라를 보러오는 사람들이다. 부하라 못지 않게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곳이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 이찬칼라의 성벽. 이런 성벽이 둥그렇게 2km에 걸쳐 있다.
ⓒ 김준희
히바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부하라에서 6시간을 달려온 것이다. 슬롬의 도움을 받아서 이찬 칼라 안쪽에 많이 있는 B&B 호텔을 골랐다. 'ISLAMBEK'이라는 이름의 호텔에서 4일을 묵기로 했다. 가격은 아침 식사 포함해서 하루 15달러.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인 이곳에서 날 맞아준 사람은 무라드벡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다. 이 가족의 큰 아들이자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소년이기도 했다.

13살이라는 무라드벡은 5살에 학교를 입학해서 현재 9학급에 있다고 한다. 우즈벡의 아이들은 보통 6~7살에 학교에 들어가지만 자기는 5살에 입학했기 때문에 학급의 친구들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14~15살이라고.

2남 2녀의 장남인 무라드벡은 한눈에 보더라도 호텔일 하랴, 학교 공부하랴, 동생들 돌보랴 바쁜 것 같았다. 13살이라는 나이에 비해서 말과 행동이 어른스러운 소년이다. 내가 저 나이 때 뭐하고 있었더라를 생각하니까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 히바 호텔의 소년 무라드벡
ⓒ 김준희
씻고 정리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간이지만 이찬 칼라 가운데에 있는 정보센터에 들러서 지도를 구입하고 거리를 걸었다. 히바는 부하라보다도 작다. 부하라는 그래도 도시였지만 히바는, 아니 이찬 칼라는 작은 마을이다.

현대식의 큰 건물도 없고 돌아다니는 차도 없다. 이찬 칼라라는 이름의 성벽도 유적이고 그 안에 모여있는 메드레세와 성원과 첨탑도 유적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현지인들의 집이 뒤섞여있는 독특한 구조다.

이찬 칼라는 흔히 생각하는 성의 개념과도 일치한다. 성의 높이는 8m, 두께는 6m, 길이는 2km에 달하는 이 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고 그 안쪽으로 거주 공간이다. 아직까지도 성의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몇 안 되는 장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찬 칼라의 내부는 복잡한 골목이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도 있어 보였지만, 이찬 칼라의 어디서든 보일 것 같은 첨탑들 때문에 길을 잃는다 해도 큰 걱정은 없어 보였다. 히바에 도착한 첫날 저녁이다. 타슈켄트에서부터 1000km가 넘게 서쪽으로 온 것이다.

▲ 이찬칼라의 중심가.
ⓒ 김준희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 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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