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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만에 세 번째 시집 <돼지들에게>를 낸 최영미 시인.
ⓒ 정하경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 그는 모른다. /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 (중략) //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 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 /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 // (후략)"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44)가 7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 <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의 표제작 <돼지들에게>의 일부분이다.

어떤가.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강렬하게 와 닿는 그 뭔가가 있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벌써 그의 이 시를 둘러싸고 문단에서 적잖이 술렁거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출판사는 재판을 찍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영미 시인은 정작 별달리 겪는 바가 없다고 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세상은 의외로 차분하며 괴롭히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특히 최영미 시인은 '여우'는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다가 시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변했다고 하여 관심을 끌었는데, 인격과 명예는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고 했다.

지난 5월 발표한 첫 소설 <흉터와 무늬>를 두고도 자전소설이 아니냐는 질문에 봉착했던 최영미 시인은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논란의 한 가운데 서기도 한다.

대면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최영미 시인을 이메일로 만났다. 다음은 최영미 시인과의 일문일답.

우려와는 달리 세상은 의외로 차분

▲ 시집 <돼지들에게> 표지.
ⓒ 실천문학사
- 잘 알겠지만 이번 시집 <돼지들에게>를 놓고 문단에서 적잖은 설왕설래가 있다고 들었다. 시집을 내기 전 어떤 분에게 원고를 보여줬는데 너무 센세이셔널 한 내용이라면서 세상이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데,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세상이 시끄러워질 수 있는 센세이셔널 한 내용이란 어떤 것인지, 또 시집을 낸 지금 세상의 반응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의 조언대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저는 이번 제 시집의 내용이 센세이셔널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로서 당연히 하고픈 말을 시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의 주변에서 우려했던 것과 달리, 세상은 의외로 차분하며, 별로 저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시집은 초판 5천부를 찍은 뒤 열흘 만에 2쇄에 들어갈 정도로 잘 팔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특히 세간의 관심은 최 시인의 시가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최 시인도 "처음에는 아무개라는 대상을 염두에 뒀다. 그러나 시상을 정리하면서 아무개는 보편적으로 변했다"고 했는데, 그래도 세상의 호기심은 최 시인이 가리킨 달이 아니라 최 시인이 시를 쓸 때 생각했던 마음속에 있는 누구이다. 혹시 그가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지. 밝힐 수 없다면 왜인지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
"저는 그 아무개에 대해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말할 게 없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시에 등장하는 '돼지'는 한 사람이 아니며(그래서 제목도 복수인 '돼지들'에게 이다), '여우'는 특정인을 모델로 착상했습니다. 나는 그 아무개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으며 그를 존경하지 않으나, 한 개인으로서 그의 인격과 명예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문제의 시 <돼지의 변신>을 감상하고 넘어가자.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 그는 여우가 되었다 //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느냐고 우러러보면서 /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나는 슬프다."

변방 콤플렉스 벗지 못한 지적 속물 너무 많다!

- 아무래도 최 시인의 시에 나오는 '돼지'를 비롯 '여우' '개'와 같은 시어들이 묘하게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내가 이해하기는 돼지는 탐욕스러움 , 여우는 교활함, 개는 충성심 등으로 우리의 지식 사회에 만연한 바이러스 같이 읽힌다. 이들 시어들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 축구광답게 독일 가서 월드컵을 구경할 계획이라는 최영미 시인.
ⓒ 정하경
"그건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시를 쓰며 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상징과 비유가 나오는 편이라서 …… 나중에 편집자와 기자들이 묻길래, 급한 대로 둘러댄 설명이 시의 해석을 편협하게 만든 것 같아 지금 약간 후회됩니다. 그 정확한 의미는 시 속에 다 있다고 할까요."

- 한국의 지식인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너무 경직돼 있다고 지적했었던 최영미 시인의 글을 본 기억이 있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변방 콤플렉스를 벗지 못한, 지적 속물이 너무 많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압도하는 게 비단 지식계만 아닌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 시집을 읽는 법이야 독자들 나름의 방법이 있겠지만 시를 쓴 시인으로서 어떤 독법이 적합하다고 보는지.
"그냥 언어의 구조물로 봐 주세요."

- 이번 시집은 한국사회의 위선, 지식인의 이중성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번 시집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인지.
"글쎄, 저도 그걸 모른답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하나하나의 시가 존재할 뿐이지요."

-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주로 언제 쓴 것들이며, 시를 썼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나 시작 노트가 있으면 얘기해 달라.
"스무 편 가량은 지난 7년간 모인 시들이며, 나머지는 올 여름에 썼습니다. 저는 주로 집에서 작업합니다."

독일 가서 독일 월드컵 구경할 터

- 이번 시집에서 특히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축구광답게 축구에 관한 시도 함께 싣고 있다.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리고 어느 정도 좋아하는지.
"똑같은 질문을 열 번, 아니 오십 번은 받은 것 같습니다. 답은 역시 제 시 속에 있지요. 순수와 열정이 저를 푸른 잔디로 이끌지요."

최영미의 시 '인생보다 진실한 게임'을 감상해보자.

"돈과 권력과 약물로 오염된, 아무리 더러운 그라운드에도 한 조각의 진실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 축구이다."

- 웬만한 유럽 축구 경기는 다 볼 정도라던데, 월드컵 때 아마도 독일에 직접 가서 구경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 계획이 있는지.
"네, 물론이지요."

- 시 '인간의 두 부류'를 보면 최영미 시인은 사회의 위선을 까발리고 조롱하고 하는 적극성으로 보아 '골대를 향해' 돌진하는 '공격수' 같은 느낌이 드는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최 시인은 공격수인지, 아니면 수비수인지. 또 최 시인이 지향하는 인간형은 무엇인지.
"저는 지극히 수비지향적인 사람이지요. 저를 공격수로 생각했다면, 저에 대한 선입견으로 제 시를 액면 그대로 읽지 않으신 겁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의 위선을 '조롱'한 게 아니라, 폭로하고 비판한 겁니다. 그건 구분해주면 좋겠습니다."

- 이번 시집에는 또 여행시들도 있다. 최영미 시인의 여행은 익히 알려진 바 있는데, 많은 곳 다녀본 결과 가장 매혹시키는 곳이 어디던가.
"스페인."

시적인 소설과 소설적인 시를 쓰고 싶다!

- 최영미 시인은 <서른 잔치가 끝났다>에서 '잔치'가 1980년대 '운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돼 적지 않은 오해(?)를 받았는데, '잔치'는 무얼 의미하는가.
"그냥 시를 쓰던 당시 저를 불러낸 단 한번의 '모임'이었지요."

- 지난 5월 '오랜 꿈'이었던 소설 <흉터와 무늬>를 발표하고 이번에 시집을 냈는데, 시와 소설 중 어느 장르가 자신에게 더 맞다고 생각하는지.
"둘 다. 시적인 소설과 소설적인 시를 쓰고 싶어요."

-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작품인지 간단히 소개해 달라.
"구상 중이라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닙니다."

- 발표한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가 있다면.
"다."

- 그동안 무얼 하며 지내는지, 그리고 요즘 하루 일상을 말해 달라.
"미술 강의를 무사히 끝내, 시원섭섭합니다. 잠시 쉬고 싶은데, 잘 안 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주변이 정리되는 대로 다음 소설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동안 '최영미의 서양미술사'를 들어준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를 아는 여러분 모두 따뜻한 겨울을 보내시며,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끝으로 최영미의 시 <시대의 우울>을 감상하며 이 인터뷰를 갈무리하자.

"그처럼 당연한 일을 하는데 /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했던가 // 박정희가 유신을 거대하게 포장했듯이 / 우리도 우리의 논리를 과대포장했다 /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 관념으로 도배된 자기도취와 감상적 애국이 / 연구실에서 광장으로, 감옥에서 시장으로 나온 흑백논리가 / 종이에 인쇄되어 팔리는 // 이것이 진보라면 밑씻개로나 쓰겠다 / 아니 더러워서! 밑씻개로도 쓰지 않겠다"

돼지들에게 - 제5회 이수문학상 수상작

최영미 지음, 은행나무(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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