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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페미니즘'이 '낡은 것'이 됐다. 이야기만 꺼낼라치면 "또 그 소리냐?"하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진부하게 여겨지는 걸까? 아니면 상투적인 논쟁만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여성을 위한, 나아가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은 그렇게 전락하고 말았다. 기껏해야 "페미니스트도 군대 가라!"는 뻔한 이야기들만 불러 오는 것으로.

하지만 페미니즘을 그렇게 다뤄야 하는 것일까? 인류가 문명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권력은 남성들의 것이었다. 이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은 남성들 위주로 흘러갔다. "하느님, 아버지!"란 말이 그렇다. 또 남성 호르몬이 여성화된다고 걱정하는 뉴스 보도도 그렇다. 성폭행 사건이 발발하면 피해자(여성)가 가해자(남성)보다 더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도 그렇다. 남성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페미니즘이 진부하든 상투적이든 간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반갑다. 한국 사회 일상 속에서의 성 권력 차이를 포착해낼 줄 아는 그녀의 시선은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적격이다. 경험과 이론이 한데 어우러진 <페미니즘의 도전>은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하고 남성을 공격하는 이론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은 물론 페미니즘의 나아갈 길까지 제시하고 있다.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고 생산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페미니즘'의 '도전'을 기대케 한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는데 1부에서는 여성주의가 필요한 이유와 오늘날의 페미니즘과 여성이 처한 위치를 탐색하고 있다. 1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주의'가 필요한 이유를 "저항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협상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주의를 경쟁이 아닌 조화의 수단으로 보자는 것이다.

남성들이 여성주의를 배격하는 데는 여성주의가 팜므파탈과 같은 맥락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라 할 수 있다. 팜므파탈은 남성들 스스로 만든 것이며 여성들이 요구하는 것은 남성들의 거세가 아니라 평등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옛날 흑인이 백인에게 요구했듯이, 오늘날 동양인이 백인에게 요구하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1부에서 다루는 여성언어의 필요성이나 성스러운 '어머니'의 일을 남성에게도 부과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들도 모두 '조화'를 위한 제안인데 1부만 갖고도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짤막짤막한 분량의 글에도 불구하고 정희진의 글이 분명한 태도를 보이는데다 남성들의 생각과 다르게 '이승연 누드사건'이나 '특권화된 어머니'와 '탈특권화된 아줌마'를 다루는 것처럼 주류 속에서 비주류의 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실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2부에서는 가정폭력과 인권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처지를 지적하면서 한국의 진보를 비판하고 있다. 이 대목은 확실히 눈길을 끈다. 페미니즘 또한 한국사회에서 보면 진보의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정희진은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 얼핏 보면 동지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정희진이 들으면 펄쩍 띌 소리다. 정희진의 눈에 한국의 진보는 '진보가 없음'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얼마 전 한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는 한국의 페미니즘은 중산층 여성들에 의한 것이 많다며 길거리 여성들이나 돈 없고 가난한 빈민 여성들과는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투로 비판을 했다. 보수 세력이라 불리는 이들이 시민단체를 비판할 때 '시민의 지지가 없는' 정체성을 지녔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로 비판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는 진보적 언론인이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는 중산층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역겹다"고 말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정희진에 따르면 이것들은 '진보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두 남성의 언어에 정희진은 정면으로 맞대응을 한다. 남성들이 경험하지 못한,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무식을 넘어 지극히 우파적이라고 못 박는다. 정희진은 "여성이 독자적인 개인, 시민, 인간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구조상 '중산층 부르주아 여성'이 있기나 한지도 의문"이라며 여성운동은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언어가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에서 나온 것임을 비판하는 것이다.

2부는 확실히 논쟁거리들이 담겨있다. 일제시대 군 위안부 문제와 같이, 전시 성폭력을 여성 인권 침해로 보지 않고 민족 말살의 하나로 보고 흥분하는 남성들에 대해 정희진은 욕 먹을 각오를 하고 비판의 날을 감추지 않는다. '군 위안부'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원하려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향해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라고 묻는 말은 논쟁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논쟁과 별도로 정희진의 글 자체를 외면할 도리는 없을 테다.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다.

3부는 '성판매' 여성의 인권과 여성으로서의 나이 듦, 군사주의 등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남녀 모두에게 눈길을 끄는 것은 뜨거운 감자인 군대문제일 테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할 때 남성들이 단골로 하는 말이 "너희도 군대 가라"인 만큼 정희진의 논리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녀는 생각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남성들이 군대 문제를 갖고 여성들에게 행하는 언행은 가기 싫었던 군대를 향해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희진은 남성들이 이회창 가의 사람들처럼 군대 가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되면서도 분풀이는 군대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푼다고 지적한다. 일종의 우월감과 보상 심리를 얻으려는 것인데 정희진은 이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차라리 소모적인 논쟁보다 여성들과 연대하면 군사주의에 향한 사회적 문제 제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말이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지는 미지수이지만 확실히 미래지향적인 생각의 전환을 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제목처럼 정희진의 글은 도전적이다. 도전은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이라면 누구도 피하고 싶지 않을 테다. 소모가 아닌 발전을, 싸움이 아닌 동지애를 꿈꾸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희진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는, 치열함이 느껴지는 글쓰기를 선보인 만큼 정직한 신뢰감이 든다. 이런 신뢰감을 기반으로 한 페미니스트의 글이라면 한번 '상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기든 지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것이니까.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교양인(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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