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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학작가회의 작가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조세희 소설가.
ⓒ 오마이뉴스 조은미

"노동자 농민에 대한 인식에선 오히려 1987년보다 악화됐다"
"국가는 쟁의 현장과 집회 현장의 경찰폭력을 제도적으로 근절하라"


지난 11월 15일 여의도 농민 집회에 참석했다가 뇌출혈로 숨진 농민 고 전용철씨의 죽음 앞에 작가들이 나섰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씨를 비롯한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소속 작가들은 7일 전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합동 조문을 마친 뒤 작가 183명의 이름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낭송에 나선 농민시인 이중기씨는 "대한민국 농민은 농사 지어, 인간이 누릴 최소한의 것도 못 누리고 산다"며 "여의도 농민집회 현장에 나도 있었다. 여의도는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짐승의 시간이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조세희씨는 "'난쏘공'은 이대로 가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쓴 거고, 그 못된 상상에 우리가 도착해 있다"며 "우릴 모은 건 전용철 농민이다. 이러면 안 되겠다 생각한 게 11월 15일이다"고 말한 뒤 여의도 농민집회에 대한 경찰의 과잉진압을 증언했다.

조씨는 또 "농민은 350만, 노동자는 850만 명이다. 그 사람들에게 딸린 가족은 어떡하냐? 이 사람들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며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까지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럼 우린 낙원에 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이게 낙원이냐? 아니다, 농민의 목소린 더 커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노동자 농민에 대한 인식에선 오히려 1987년보다 악화됐다. 그때는 그래도 노동자 농민이 죽으면 정권도 겁을 냈다. 그런데 이젠 겁도 안 낸다"며 "노동자, 농민의 죽음 앞에 아무런 아픔이 없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게 큰 일이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또한 "글을 쓰고 싶다. 문학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제발 우리가 이런 문학외적 발언을 안 해도 되는 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국가는 경찰에 희생된 고 전용철님의 사인을 꾸밈없이 밝히고 부상당한 농민들에 대해 보상하라"며 "또한 쟁의 현장과 집회 현장의 경찰폭력을 제도적으로 근절하라"고 촉구했다.

'난쏘공' 작가 조세희의 분노 "난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 카메라를 메고 노동자 집회에 참석한 조세희씨. (자료사진)
ⓒ오마이뉴스 권우성

7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기자회견에 참석한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씨가 분노하듯이 입을 열었다.

노동자·농민들의 집회현장에 참석, 시대의 아픔을 사진으로 기록해 온 그는 11월 15일 여의도 농민집회 현장에 어김없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경찰폭력을 증언하면서 "전용철 농민하고 나하고 차이라면 난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브레히트가 얘기했잖나? 난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작가 조세희씨의 발언을 요약한 내용이다.

“내가 십몇 년 동안 집회장을 다녔다. 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생각을 바꾸기에는 늙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하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 이러면 안 되겠다 생각한 게 11월 15일이다. 난쏘공은 이대로 가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쓴 거고, 그 못된 상상에 우리가 도착해 있다.

농민의 이름으로 내가 얘기하는 거다. 우리 주인은 국민이라고 헌법에도 나와 있다. 나도 건강이 아주 나빠서 그날 조심조심했다. 나는 그냥 카메라 매고 현장 간 거다. 그런데 (그날 나온 경찰) 부대는 막강한 부대다.

이땅 주인인 전용철 농민은 그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다. 그날 물대포가 셌다. 옆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물대포 쏘면 고개가 팍 간다. 난 그렇게 센지 몰랐다. 물대포 한 번 쏘는데 누가 와서 '조심하세요’'라며 팔을 털어주는데 벌써 얼어서 버적버적거린다. 난 잠깐 후퇴했다. 왜냐? 무서우니까. 그런데 조세희 다쳤단 소리는 마라. 그날 나도 10센치 상처 있다.

시위장 가보니 숫자는 점점 줄더라. 그래서 나라도 가야지 하고 갔다. 근데 내가 몇 초 뒤 보니까 아주 쑥밭이 됐다. 내가 카메라맨이라면 그 피 흘리는 장면 다 찍었을 거다. 하지만 난 작가니까... 나중에 보니까 사진이 딱 두 장 있더라.

쭉 후퇴 시키며 갔다. 큰 물대포를 받았다. 마침 잠바를 준비한 두 농민이 옆에서 날 지켜줬다. 그때 어느 부대가 또 급습했다. 그건 급습이라고 쓰자. 농민 하나가 퍽 쓰러지고, 다른 농민 한 명이 나더러 도망가라고 그러더라. 그때 난 영혼이 푹 쓰러졌다. 그 뒤 또 급습했다. 전용철 농민하고 나하고 차이라면 난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최근엔 전용철 농민이 죽고 며칠 전엔 나주에서 농민이 분신했다. 고통스런 중압을 이기지 못해 귀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고귀한 생명을, 자기 목숨을 바치는 큰 희생을 한 거다. 그 고통 받는 숫자가 850만 명이 비정규직이다. 내 아들 포함해 몇 십만원 못 받는 아줌마, 아저씨... 농민은 350만, 노동자는 850만 명이다. 그 사람들에게 딸린 가족 숫자는 어떡하냐? 이 사람들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까지, 대통령들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럼 우린 낙원에 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많은 숫자가 고통을 안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데 이게 낙원이냐? 아니지.

비정규직은 앞으로 문제다. 한 가지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일어나는 거다. 농민의 목소린 더 커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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