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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애자(愛子) 박도 군에게

귀군의 단안(斷案)과 자연 속에서 창작에만 몰두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생의 극치일세. 나는 너무 노쇠해서 보행도 어려워 하루 종일 실내에서만 칩거하고 있네. 96세라면 누구나 놀라지. 그러나 생의 보람을 느끼는 것은 귀군과 같은 제자들이 있다는 점이네.

명작을 기원하네.

2005. 10. 박철규


며칠 전, 전남 여수시 율촌면 여흥리에 사시는 은사 박철규 선생이 보내주신 편지 글월이다. 선생은 이 편지글과 함께 올 6월에 쓰신 당신의 시 한 편도 함께 보내주셨다.

산비둘기 울던 날

6월의 훈풍을 타고서
연일 뒤 숲에서 산비둘기가 울어댄다
구루루 쿠쿠 구루루 쿠쿠 …

산비탈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데
사람 얼굴 하나 찾아오는 이 없는
이 극한의 적막 속에
산비둘기 울음에는 피가 맺혔다.

하고 많은 낮과 밤을 지새우면서
그렇게도 그립고 아쉬운 한(恨)을 삭이지 못해
오늘도 하루 종일
구루루 쿠쿠 구루루 쿠쿠인가.

내 어린시절 할머니께서
“서방 죽고 아들딸 죽고 어찌 어찌 살라”고 운다는 말씀에
즉석에서 산비둘기는 내 마음 속에
둥우리를 틀었다.

꾀꼬리 소리처럼 아름답지 못하고
뻐꾸기 소리처럼 하늘을 찌르지 못하는데
어쩌다 이 노심(老心)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가.

세월은 흘러 흘러 할머니도 가시고
나 이제 늙어 세월만 헤어보는
이 삼간두옥에
오늘도 산비둘기 소리만 은은하다.


▲ 지난날 은사의 편지, 한지 두루마리에 붓글씨로 써 보내주셨다
ⓒ 박도
96세의 은사가 맑은 정신으로 시를 쓰시고 옛 제자에게 편지를 보낸 정성과 건강에 감동할 뿐이다. 원래 선생님은 편지를 보내실 때 한지 두루마리에다 붓으로 써 보내셨다.

그런데 이번 편지는 편지지에 볼펜으로 써 보내셨다. 아마도 지금은 붓글씨를 쓰실 여력이 없으시나 보다. 몇 해 전,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친구와 제자들에게 남기는 말씀을 시집으로 엮어 보내온 바, 그 가운데 <고별>을 들어본다.

고별(告別)

"까마귀 죽을 때 그 소리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 그 말이 선하다"고 했던가

나 이제
참회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고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멀지 않아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릴 것입니다.
마음이 자꾸만 바빠집니다.
필연코 떠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길을 잃고 어두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끌어주던 친구여
내가 먼 여로에 지쳐 길가에 쓰러졌을 때
물을 먹여준 친구여
내게 첫 사람을 준 그 이여
나를 모멸하고 음해하던 친구여
나를 잘 따라주던 제자들이여

이제는 모두가 내 친구들입니다.
애증(愛憎)의 잔재는 추호도 없습니다.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고별인사를 드립니다.

내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이 바빠집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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