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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소 국어 발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이 하는 말이나 자신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더군다나 영어가 세계화라는 망상을 틈타 곳곳에 그 뿌리를 내리려고 아우성치는 시점에, 국어 발음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살피려는 이가 얼마가 되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정신세계를 만들어 가는 가장 중심적인 기제가 모국어이고, 그 모국어 형성의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이 다름 아닌 인간의 소리, 곧 발음이고 보면 그것에 대한 연구와 교육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이 [게]/[개] 맛을 알아?

몇 해 전 한 패스트푸드 광고에서 중견 연기자가 “너희가 ‘게맛’/‘개맛’을 알아?”라는 문구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에 주목해 그 중견 연기자가 발음하는 것에 관심을 두거나 의식적으로 들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특히 국어 발음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터라, 방송 중 배우나 아나운서들이 발음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국어 모음 발음 중에서도 ‘ㅔ’와 ‘ㅐ’ 발음의 구분이 항상 어려워 그 기회를 포착하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공중파 방송의 아나운서나 연기자들의 발음이 정확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그 중견 연기자의 발음에서 ‘ㅔ’와 ‘ㅐ’를 정확하게 구분해 내고 있는지 유심히 들을 기회가 온 것이었다. TV의 영상과 함께 볼 때는 분명히 [게]로 들리던 것이, 이상하게 화면은 보지 않고 소리만 들어보면 제대로 [게]와 [개]를 구분해 내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혹시나 누군가가 [게]가 아닌 [개]로 듣고 이의를 제기했더라면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사에서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발음상의 오류나 애매함을 부지불식중에 많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발음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알뜰하게 살핀 책

▲ 한국어의 발음 겉표지
ⓒ 삼경문화사
배주채 저 <한국어의 발음>은 아마도 이와 같은 문제점의 인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기존의 수많은 국어 관련 음운론 서적이 대부분 이론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이론보다는 실생활 중심의 발음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발음이란 상당히 막연한 대상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인의 몇 퍼센트가 하는 발음을 현실발음이라고 기술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모든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 발음을 엄격하게 규정하지 않고 느슨하게 규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발음은 ‘실제로 사용되는 비율이 꽤 높은 발음’ 정도로 정의해 두기로 한다. 이 책에서는 현실발음과 표준 발음을 대비해 가면서 양쪽을 다 기술대상으로 삼을 것이다.(p19)


보편적으로 표준 발음을 위주로 단편적인 현실 발음의 나열에 그치는 많은 이론서들과는 달리 <한국어의 발음>은 현실의 다양한 발음을 열거하면서 표준 발음과의 비교 속에서 음운론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자음과 모음, 그리고 자음과 모음이 한 뭉치를 이루어 나는 발음상의 최소 단위인 음절을 다루고 있다. 자음과 모음에서는 국어의 다양한 자음과 모음의 속성과 지역에 따른 개수와 역사적 변화 양상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국어의 음절 구조에서는 ‘모음 단독’(아, 어…), ‘자음+모음’(가, 나…), ‘모음+자음’(알, 언…), 그리고 ‘자음+모음+자음’(각, 강…)을 기초로 음절 구조의 다양한 제약을 다루고 있다. 가령 ‘ㅈ, ㅉ, ㅊ’ 뒤에 ‘ㅑ, ㅕ, ㅛ, ㅠ, ㅖ’ 가 연결될 수 없으며(어긴 예 : 쟈, 젹, 죤, 쪧, 쨥…), 자음 뒤에 ‘ㅢ’가 연결될 없다(어긴 예 : 긔, 늬, 듸…)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2편은 실제 우리 국어 형태론의 이론적 부분까지 아우르면서 발음의 세부적인 원리와 실천의 양상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여타 음운론 관련 서적에서는 살피기 어려운 한자어와 외래어의 발음 부분까지 자세하게 살피고 있다.

가령 고유어와 한자어의 표기는 같지만 발음을 달리하는 예는 ‘물질[물질] : 해녀가 물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따는 일(고유어)’ 와 물질[물찔] ; 物質(한자어)’이다. 한자어와 외래어의 예는 ‘사인[사인] : 死因(한자어)’ 와 ‘사인[싸인] : sign(외래어)’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그동안 국어학, 특히 음운론 분야에서 소홀하게 취급해 온 실제 발음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예에 있다. 실제 언어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발음의 양상을 제대로 포착하고 과학적으로 기술해 내는 작업은 정말로 끈기 그 이상의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일 것이다. 저자는 그런 부분을 잘 극복해 내고 있다.

이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

국어교사인 나에게 이 책은 실제로 학생들에게 말소리 지도(발음 교육)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작은 촉매재가 되었다. 언어가 내용과 형식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면, 내용은 ‘의미’가 형식은 ‘소리’가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이처럼 언어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중심을 이루는 발음(말소리)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면 이는 언어(국어)의 한 측면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동안 국어교육에서 실제로 발음교육을 소홀히 해 온 것은 사실이다. 특히 수능 위주의 교육 체제로 바뀌면서 문학이나 독서 위주의 읽기 위주 교육 쪽으로 편중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듣기 시험을 치르고 있지만 주로 발음이나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오해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 내용을 듣고 요약하거나 주제를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편향된 교육과 시험으로 우리 아이들은 거의 말소리(발음)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우리말의 기본 자음과 모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그 문제의식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고등학생뿐만 대학을 나온 이들에게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최근에 기업들이 국어능력 시험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어의 발음>은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좋은 참고 서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어의 올바른 이해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한국어의 발음 - 개정판

배주채 지음, 삼경문화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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