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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황우석 교수는 지난 8월 3일 오전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계 최초로 개를 복제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마이뉴스>는 최근 일련의 기사에서 '황우석 교수의 복제 연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언급하며, 과거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한 찬사만 있을 뿐 그에 대한 성찰이나 비판이 부재했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그러나 해당 비판들의 상당수는 새로운 비판이 아닌 과거 주장의 복각판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특히 특정 종교에 기댄 주장들은 미국에서 불고 있는 과학에 대한 종교의 강요 운동과 유사한 궤에 서 있다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한 정도의 문제점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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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황우석 박사의 연구 결과를 단순히 민족주의적 광기로 파악하는 것 역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선정성에 기대는 황색 저널리즘은 경계의 대상이지만, 그 논리의 연역으로 내용없는 비판을 통해서 실체 없는 주장을 남발하는 것 역시 저널리즘의 원리와는 큰 거리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용없는 비판, 실체없는 주장은 저널리즘 원리와 큰 거리

먼저 <오마이뉴스>가 '새로운' 비판이라고 기사화한 소위 연구 과정에서의 윤리의 문제 특히, 난자 채취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발표된 그 다음주 네이처(Nature)지에서도 문제를 삼았던 부분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의 일부 경쟁 학자들이 네이처(Nature)의 지면을 빌어 간접적인 인터뷰 형식으로 주장한 바 있는 사실이다.

물론 그 주장의 상당 부분은 일회성 주장으로 그쳤으며 그 뒤로 실제 문제가 있었는가의 문제는 사그러진 게 사실이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일회성 폭로가 이루어졌지만, 그 뒤에 실질적으로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는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해당 사건이 정치적 사건이라면 그에 대한 특검을 하네 마네 하며 어떤 식으로든 진행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과학적 연구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문서에 의지한 폭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나눠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해당 주장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특히 '황우석 교수의 말이 바뀌었으니 문제다'라는 식의 주장은 과학자의 활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치인의 공약에 대해서나 적절한 비판이라고 보여진다. 과학자는 그들의 연구 활동으로 말하는 것이고, 그에 대한 비판 역시 연구로써 만들어지는 것이지 말의 성찬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부 종교계가 이야기하는 '배아도 생명이니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안 된다'는 주장은, 특정 종교 집단의 생각을 그 종교 집단의 논리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길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배아가 생명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가진 혹은 집단이 가진 철학의 문제이고, 그 철학이 타인의 자유나 생명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한 검열되거나 그 철학 자체가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 또한 특정한 종교적인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인간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가시적이고 드러나는 해악을 미치지 않는 한 비판의 도마에 오를 이유 역시 전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배아=생명' 논리는 특정 종교의 신념... 교리 위배된다고 사냥하면 안 돼

▲ 황우석 교수와 인간배아줄기 세포 연구에 반대하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지난 6월 15일 오후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 주교관 3층 정 대주교의 집무실에서 40여분동안 비공개 면담을 갖고 의견을 나눴다. 면담을 마치고 주교관앞에 나온 황우석 교수와 정진석 대주교가 밝게 웃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특정 신앙이 과학의 연구에 대해서 그것이 성역이라는 이유로 혹은 그것이 교리에 대해서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냥을 시작할 때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세상은 과학의 암흑 이상이 될 수 없다. 과학적 근거라고는 별로 찾기 힘든 창조론을 학교에서 진화론과 같은 비중으로 가르치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장은 '그들의 주장'에 불과하며, 과학을 종교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한 관련 학계의 비판은 황우석 교수에 대한 일부 종교계 인사들의 비판에 대해서도 같이 들려 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배아 줄기 세포가 아닌 성체 세포를 이용한 복제나 다른 기법에 대한 연구의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 자체를 비판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배아를 이용한 것이든 아니면 성체 줄기 세포를 이용한 것이든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면 그 연구들은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길이 설득력이 있다면 그 연구 성과들을 내놓고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보여진다. 그러한 길이 있으니 지원하라는 식의 정치적인 압력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들이 말하는 '젓가락 질' 기술이든, '손재주'이든 그 결과를 국민들과 정부에 제시하면서 그것이 보다 나은 대안임을 입증하면 될 일이라고 본다.

황우석 교수팀이라고 해서 소위 '대안적 방법'은 타당성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도 학자 집단이고 해당 '대안'이 보다 합리적이고 좋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고 본다면 수용하리라 본다. 연구 초기부터 정부나 혹은 다른 기관이 돈을 대라는 식의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없다.

황우석 교수가 영롱이 복제 이후에도 겪어온 가시밭길을 생각하더라도, 솔직히 황우석 교수팀이 연구 성과가 <사이언스>의 표지를 장식하기 이전 정부는 과연 얼마나 많은 지원을 했는지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열광과 환호 없이 일했다. 아니 최소한의 지원 없이 일했다.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은 편한 길을 가겠다는 식의 주장은 아니라고 필자는 믿고 싶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먼저 보여 준 뒤에 기자회견을 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본다. 과학자는 기자회견을 통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기자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성과를 알리기는 하지만, 기자회견을 통해서 연구를 진척시키지는 않는다.

'황우석 활동 '민족주의' 기댄 것'이라는 비판은 엘리트 주의서 기인한 발상

마지막으로 '황우석 교수팀의 활동이 민족주의에 기댄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은 그야말로 국민을 무시하는 엘리트 주의에 기인한 발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이야기를 다시 할 필요는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특정 과학자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닌 한 그들의 연구에 대해서 혹은 그들의 활동에 대한 국민적인 지원에 대해 속좁은 국가주의 혹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과학에 대한 과도한 정치적 해석이다.

또한 한국 국민의 과학에 대한 이해 정도가 과학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업으로 삼는 이들보다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별로 없다. 실제 생명공학 분야의 발전은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현실적인 근거는 많이 있으며 국민들은 그 가능성을 볼 뿐이다. 좀 단순한 예를 들면, 진짜 병이 나서인지 아닌지 몰라도 이건희씨가 미국에 가서 폐 관련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물론 공짜는 아닐 것이다. 국민들이 바라 보는 것은 그런 부분이다.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는 결국 한국의 생명공학에서 특히 의료 분야에서의 획기적인 진보를 낳을 수 있고(실제 진보가 될지 아닐지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얼마나 많은 인력이 양성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 덕에 한국의 이익이 커진다라는 측면에 국민들의 이목은 집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이 노벨상 하나를 받고 말고의 문제는 어쩌면 대단히 부차적인 일이다.

말로만 하는 비판은 건설적이지 않다

일전에 삼성이 새로운 플래시 메모리를 내놓았을 때 기뻐한 국민들은 그 기술을 통해서 자기 월급은 올라가지 않지만,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커지고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우리' 경제가 나아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 하듯이 21세기의 경제는 기술 주도의 경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한국 경제라는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경제적 배경은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성과에 의해서 성장 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황우석 박사 팀의 연구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일부 논자들이 손쉽게 단정하듯이 민족주의에 기반한 열정 이상의 것이며 더 현실적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좋은 성과들을 내고 있고 그들에 대한 정부의 발굴과 지원 사업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그에 대한 촉구는 물론 황우석 박사팀의 비판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남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가 입증된다고 믿는 과학자는 없을 것이다.

어떤 과학 활동이든 사회의 비판이나 감시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운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말만의 비판은 전혀 건설적이지도 않으며 특히 특정 이념이 먼저 서고 그것을 통해서 경험 과학의 과학 활동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그 당사자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그들을 다시 관찰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비판이 말의 성찬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 역시 무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그들도 이제는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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