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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추악'하단다. 그들은 노예 근성에 젖어 있고 고여서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장독의 문화에 사로잡혀 있단다.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일으키는 말이다. 도대체 이 말을 한 이는 누구인가? 얼마나 배포가 크길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며 조만간에 미국과 함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중국의 국민들에게 이런 말을 했던가?

그 말을 한 이는 '인민과 정부의 감정을 도발'했다는 죄를 받았던 지식인 '보양'이다. 그가 중국인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토해 냈고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일본 언론에서 그가 동포의 추악한 이면을 폭로해 일본인이 중국인을 더 깔보게 됐는데 동포들에게 미안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정도다. 일본 언론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언론이라도 그럴 테다. 그의 말을 듣노라면 도대체 이 사람은 동포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 <추악한 중국인>
ⓒ 창해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보양은 중국 386세대를 이끈 지식인으로 평가 받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추악한 중국인>에서 보는 이의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동포를 비판했건만 어째서 그는 그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가? <추악한 중국인>이 등장한 때를 상기해 보자. 그 때는 문화대혁명 이후 온갖 사상이 중국 본토를 향해 뻗어 오는 때였다. 국적 불문하고 사상이 환영 받는 때였다. 그리고 그때 보양도 등장했다.

"중국인 개개인은 모두 용과 같이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고, 위로 뛰어올랐다 하면 태양을 삼키고 아래로는 나라와 천하를 다스린다고 한다. 따라서 연구실이나 시험장 같이 인간관계가 필요 없는 자리나 상황에서는 대단한 발전을 보인다. 그러나 세 사람, 즉 세 마리 용이 모이면 바로 한 마리 돼지나 벌레가 되고 만다. 심지어 벌레만 못할 때도 있다. 중국인의 주특기가 내분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그 시대에 주목 받기 시작한 보양은 중국인 세 사람이 모이면 돼지가 된다고 말했다. 그럼 10억 인구가 모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보양은 아마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상상하기도 싫었다는 뜻에서 그럴 것이다. 반대로 보양은 중국인에게 '민주'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민주의 의미는 아니다. '너는 민! 나는 주!'의 민주가 있다고 지적할 뿐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5천년의 역사도 보양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번성했던 잉카 문명과 찬란한 고대 그리스도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멸망했다고 말하며 5천년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오히려 경계하라고 꾸짖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역사만 헤아리는 버릇이 중국인의 문화를 좀 먹는 무서운 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유교에 바탕을 둔 수많은 학문들도 보양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기본 정신을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나 관료사회를 만들고 장독 구더기들을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며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인의 교훈'에는 총명함이 철철 넘친다. 바람이 불면 잽싸게 배의 키를 돌리라고 한다. 남들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어 놓으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모두다 피 흘리며 싸울 때는 발바닥에 기름 바르고 잽싸게 도망가 혼자서 모든 것을 차지하라고 가르친다. 아들딸을 미국에 보낸 어머니, 아버지들이야말로 유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공맹 학회 이사 정도는 충분히 될 만하다."
- 본문 중에서


중국인을 폐병 3기라고 말하는 보양, 이쯤 되면 보양의 안전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앞서 밝혔지만 보양은 안전을 걱정할 일이 없다. 오히려 존경 받는다. <추악한 중국인>은 중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보양의 독설 뒤에는 부끄러워하고 그것에서 반성하는 것으로 걸음을 내딛자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누가 자신의 동포를 욕하는데 좋아하겠는가? 보양도 그렇다. 그러나 보양은 동포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쓴소리로 자신의 애정을 밝혔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속 좁고, 자신들끼리 싸우기 좋아하고, 이기주의가 팽배했다고 말하는 보양의 독설 이면에 담긴 깊은 속뜻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스승의 마음, 그것과도 같았다.

"동포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추악한 이면을 폭로함으로써 일본인이 중국인을 더 깔보게 되었습니다. 동포들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지금까지 중국인들을 깔보았소. 당신들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을 뿐이오. 중국인의 단점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중국인이기 때문이오. 그동안 당신들이 보아온 것은 당신들이 교활하다고 말하는, 왜곡되고, 교만하고, 허황된 중국인들뿐이오. 20세기 이후로는 자신을 반성하고, 독립적 사고를 갖춘 신세대 중국인이 탄생하기 시작할 것이오."
- 일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


<추악한 중국인>은 보양이라는 지식인이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가 동포를 위해 감옥에 갈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할 줄 아는 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 그렇기에 <추악한 중국인>은 시종일관 더러운 내용을 읊고 있음에도 애잔함이 느껴진다.

국적과 상관없이 그것을 확인하는 건 분명 보람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흥미롭게도 책에 담긴 글이 등장한 1980년대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격동의 시기였다. 따라서 우리의 그때와 비교하며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추악한 중국인>은 보람 있는 책읽기의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추악한 중국인 | 보양 저/김영수 역 | 창해(새우와 고래) | 2005년 08월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추악한 중국인

보양 지음, 김영수 옮김, 창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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