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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구현석 한영미 가족(왼쪽부터 한영미, 민범, 용이, 구현석씨)
ⓒ 박도
<구약성서> '창세기(18:22~33)' 편에 보면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얘기가 나온다. 우리나라가 이나마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은 곳곳에 보이지 않는 의인이 숨어서 이 나라를 받치는 버팀목이 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며칠 전, 나는 한 의인 부부를 만나서 기뻤다.

바보스럽고 대책 없는 사람, 보이지 않는 의인을 찾아서

시골길은 언제나 한적하다. 버스를 타도 거의 텅텅 비었다. 아직도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적자 누적으로 이나마 버스 노선이 줄어들거나 없어지지나 않을지 자못 걱정이 된다.

얼마 전, 한 초등학교(정금초등학교)의 행사에 초대받고 갔더니 전교생이 29명이었다. 그 학교는 7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로 지난날 전교생은 평균 300여 명이었고, 최대 700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학교는 다행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농촌에는 남아 있는 학교보다 폐교가 된 학교가 더 많은 듯하다. 폐교 터가 도자기 가마터가 되고 자연학습장으로 탈바꿈되고 있다. 우리 삶의 가장 밑바탕인 농촌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시골로 뛰어든 젊은 학사 부부들이 있다. 어찌 생각하면 바보스럽기 그지없기도 하고 대책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몇 차례 대담을 청했으나 거절당하다가 마침 포도가 익었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부부는 지난 수요일(8월 24일) 그런 부부네 집을 찾아 나섰다. 아무렴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활기가 넘치는 집

▲ 벌레를 막고자 천연추출물을 뿜어주고 있다.
ⓒ 박도
그는 횡성군 공근면 오산리 들판 외딴집에 살고 있었다. 새로 지은 나무집 곁 포도원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요란한데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몇 번이나 "계십니까?" 라고 고함쳤으나 감감 무소식이라 집을 한바퀴 휘둘러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분무기를 매고서 포도원에서 불쑥 나타났다. 내가 듣기로는 유기농을 한다고 들었는데 농약을 치는 줄 알고서 깜짝 놀라 물었다.

- 무슨 약을 치십니까?
"화학성분의 농약이 아니고 식물 천연추출물인 미생물자재를 뿌리고 있습니다. 포도가 익어가자 벌레들이 어찌나 달려드는지 이걸 뿌려도 잘 듣지를 않습니다."

포도그루에는 탐스러운 송이가 주렁주렁 달려있으리라 기대하였는데 포도송이가 모두 종이봉지에 씌어있어서 애초의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봉지를 씌운 까닭을 묻자 "그대로 두면 벌레들이 달려들어 상품의 질을 떨어뜨리고 골고루 잘 익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거뭇한 날씨가 마침내 비를 뿌렸다. 그는 분무기를 내려놓고 포도원 비닐하우스 지붕을 닫았다. 수동식이었다. 그리고는 고추를 말리던 평상을 혼자 들 수 없었던지 나에게 도움을 청하여 둘이서 비가 맞지 않은 곳으로 옮겼다.

도중에 횡성여성농업인센터 소장으로 있는 그의 아내가 퇴근하면서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갑자기 집안이 소란스러워지고 활기가 넘쳤다. 그가 우리 내외를 위해 포도를 서너 송이 따고는 거실로 안내했다. 그는 구현석(40) 씨이고, 그의 아내는 한영미(39) 씨였다.

"농민운동을 하고 싶어서, 농사를 짓고 싶어서 왔습니다"

▲ 들판 가운데 외딴 집, 올 봄에 새로 지었다.
ⓒ 박도
- 언제 이 곳(횡성)으로 내려왔습니까?
"정식으로 내려 온 것은 1992년도였습니다."

그는 전남 광주 태생으로 거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그는 광주 집이 전남대 앞이어서 중학교 때 광주민주화운동을 목격하였으며, 대학 재학 때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는데 굳이 그런 얘기는 피하는 눈치였다. 농사라고는 전혀 몰랐는데 대학 재학 중 농촌봉사활동에 가서 농사일과 농촌을 배웠다고 했다.

한영미, 그는 경기도 일산 대화리 태생으로 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이 장래 희망직업 조사 때 반에서 '농부'에 손을 들었던 농사꾼의 딸이요, 지금도 농사꾼의 아내로 살고 있다. 1988년 여름 농활에 가서 구현석씨와 만나서 마침내 그를 농사꾼으로 만든 맹렬 농사꾼이다.

여성들, 특히 농촌 태생의 여성들이 더 도시 지향적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벗어나려고 하는데 그들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와서 살고 있으니 별나고 엉뚱한 사람들이다.

- 왜 남들은 농촌을 떠나는데 굳이 이곳에 정착하였습니까?
"농민운동을 하고 싶었고 농사를 짓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는 대답은 당당하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에 농촌이 개방화를 앞두고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다른 지역보다는 강원도 지방이 농민운동의 사각지대여서 1991년에 이 곳에 내려왔다가 아내와 결혼 뒤 이듬해 이 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했다. 나는 이들 부부에게서 현대판 <상록수>의 박동혁과 채영신을 보는 듯했다.

▲ 포도송이가 온통 봉지에 씌었다.
ⓒ 박도
- 애초에 목표는 이루었는지요?
"솔직히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점점 더 농민들이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노동자들은 일하다가 다치면 산재 혜택도 받지만 농민들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사농공상'이라 하여 어느 정도 대우는 받았는데 지금은 바닥입니다. 우선 농촌에서조차 농고나 농대에 진학치 않습니다. 학교도 '농(農)'자만 들어가면 학생들이 오지 않아서 요즘은 '생명공학과'니 '생명과학과'니 명칭조차 바꾸지만 용케 알고서 가장 인기없는 학과로 여전히 천대받고 있습니다."

곁에서 듣고만 있던 한영미씨가 거들었다. 그래도 남자 농사꾼들은 여자들보다는 조금 낫다고 하면서, 여성 농사꾼들의 사회적 대우는 그야말로 바닥으로 이웃 마을 젊은 부부 다섯 집 중 세 가정이 결딴났다고 했다.

농촌의 젊은 남자는 신부감이 없어서 국제결혼도 하는데 곧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나이 드신 할머니들은 남편과 사별로 혼자 사는 분이 많아서 또 다른 사회문제라고 하였다.

농사꾼이 당당한 직업으로 살 수 있는 농정이 필요

- 농사짓는 농토와 지난해 수입이 얼마였나요?
"논 17마지기에 밭(포도농원) 340평입니다. 그 가운데 10마지기는 남의 땅으로 소작농인 셈이지요. 지난해 총 수입은 900만원이었는데 농사 수입은 700만원이었고, 200만원은 농가 외 수입이었습니다."

당신이 생산한 농산물은 모두 무농약 재배로 불교 생협이나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 공양미로 납품하기에 현재로서는 판로에는 큰 애로는 없다고 하였다.

- 농촌에 들어온 것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에 온 뒤로 한 5년간 친구들과도 단절하다시피 살았습니다. 요즘은 다시 가끔 만나곤 하는데 그들 가운데 내 생활을 동경하는 친구들도 있더군요."

그는 벌써 자기가 시골사람이 다 된 듯, 얼마 전에 서울에 갔더니 답답하고 공기가 나빠서 못 살겠더라고 하면서 시골생활은 친환경적이고 그래도 여유가 있다고 시골예찬론을 폈다.

▲ 빗방울이 떨어지자 비닐하우스 지붕을 닫고 있다.
ⓒ 박도
- 피폐해진 농촌을 되살리는 방안은 무엇입니까?
"먼저 농사꾼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계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인들이 당당한 직업인으로 살 수 있도록 농정을 펼쳐야 합니다. 앞서 말한 산재보험 혜택이라든지, 퇴직 연금 문제라든지, 법적 제도적 조치와 함께 예산이 뒷받침되는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직업인들은 해마다 임금이 오른다든지, 지위가 상승하지만 농사꾼은 그런 게 없습니다.

일생을 뼈빠지게 농사지어도 퇴직금이 있는 게 아니고 아무런 사회적 보장도 없습니다. 농사꾼들이 가격폭락으로 한 해 농사를 실패하면 그 전에는 2, 3년이면 복구가 가능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연대보증으로 한 마을이 폭삭 망하기도 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농촌에 사는 게 더 보람된 삶이라고 느껴질 때 자연스럽게 우리 농촌은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우리 농업이 친환경 농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잉생산 때문에 빚어지는 가격 폭락도 막을 수 있고, 국민건강에도 이바지 합니다."

그는 그 대안으로 쿠바식 친환경적인 근교농업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도시민들도 무공해인 싱싱한 채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적정한 가격으로 이윤을 보장받을 수도 있습니다. 곧 생명을 살리는 농업이요, 도시와 농촌이 모두가 잘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도시민들의 식단도 바뀌어져야 합니다. 비만이나 성인병이 대부분 육식에서 옵니다. 육식에서 채식으로 바뀌면 '도랑치고 가재 잡는 식'으로 농촌도 살고 국민건강도 좋아집니다."

근교농업, 도시와 농촌이 모두 잘 사는 길

▲ 그가 가꾼 포도는 농약을 치지 않아서 닦지 않고 그냥 먹었다.
ⓒ 박도
- 두 아이를 농사꾼으로 만들 겁니까?
"저는 항상 아이들에게 농사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직업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대로야 되겠습니까?'

곁에 있는 아이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았다.

"저(맏이 민범, 초등학교6)는 농사짓는 목사님이 되고 싶어요."
"저(둘째 용이, 초등학교4)는 축구선수가 될래요."

나는 그의 말에 취하였다. 순간 나에게 그는 이 시대의 한 의인으로 비쳤다. 그는 나보다 꼭 20년 연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존경스럽게 보였고, 그의 삶에 견주면 도시로 양지로 쫓은 내 지난 삶이 부끄러웠다.

"선배님, 대포나 한 잔하고 가십시오" 하고 소매를 붙잡는 걸 다음으로 미루면서 아내 차에 올랐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올렸던 인터뷰 기사를 모아서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에서 <길 위에서 길을 묻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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