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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으로 올라가는 길 옆, 구부러진 소나무 숲이 있다.
ⓒ 한성희
단종이 잠든 장릉(莊陵)이 있는 영월로 가는 길은 동강을 따라 구부러진 도로를 타고 가야 한다. 지난 5월, 강원도 영월군 장릉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10분 전이었다. 6시에 문을 닫는 능을 생각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달려온 참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카메라를 챙겨 뛰어갔지만 이미 매표소는 문을 닫아 버렸다.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 보니 관광버스를 타고 온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장릉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지, 경기도 파주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순순히 물러날 내가 아니다.

무작정 들어가서 관리인을 찾으니 누군가 나와서 입장 시간이 끝났다고 한다. 잠시 올라가서 사진만 찍겠다고 하자 표도 받지 않고 의외로 선선히 그러라며 들어가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갈 각오를 하고 온 길이라 허락을 받아내자마자 서둘러 능침으로 향했다.

▲ 장릉
ⓒ 한성희
장릉은 조선왕릉 중에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는 능이다. 이유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운의 소년왕 단종(1441~1457)의 애절한 전설이 곳곳에 서려 있는 곳이 '충절의 고장 영월'이다.

엄홍도가 냇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한밤 중에 눈을 헤쳐가며 몰래 묻고 가족과 함께 도주했던 장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550여 년 전에 죽은 조선 6대 왕 단종이 강원도 이 험한 산골까지 와서 묻힌 역사의 배경을 생각해 본다.

1452년 문종이 죽자 12살에 왕위에 올라 1455년 작은 아버지였던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허울 좋은 상왕 자리에 있던 단종은 1456년 6월 사육신이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 발각되자 1457년 6월 21일 노산군으로 강등된다. 다음날 단종은 군사 500명이 삼엄한 경계를 하며 호송하는 가운데 영월 청령포로 유배 길을 떠났다.

이때 세조에 의해 참살 당한 집현전 학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년)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함께 죽음을 당한 김문기도 1731년(영조 7년)에 복위돼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채택, 가묘를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설치해 현재 사육신 묘는 김문기를 포함해 사칠신 묘가 됐다.

22일 한양을 출발해 영월로 떠난 단종이 유배를 가는 도중인 6월 27일, 사육신 복위사건에 연루돼 안동 순흥에서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이 복위 운동을 일으키다가 발각된다. 금성대군과 순흥 토호들은 수백 명이 죽음을 당했고 단종의 목숨은 죽음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장릉 수복방.
ⓒ 한성희
그해 9월 2일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갑자기 죽고, 10월 21일(음력) 추운 겨울날 17세 어린 소년왕은 교살 당해 동강에 내버려진다. 왕조실록은 금성대군이 사사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노산군으로 강등돼 유배를 떠난 지 꼭 넉 달째 되는 날이었다.

시신을 옮기면 삼족을 멸하겠다는 세조의 엄명이 내려져 그 누구도 소년왕의 시신을 묻어줄 수 없었다. 호장 엄홍도가 한밤중 눈 속을 헤치고 관을 준비해 암장하고 사라진 지 59년 후, 중종 11년(1516년)에 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이 내려졌으나 그 누구도 찾을 길이 없었다.

엄홍도가 묻은 장릉의 능침은 풍수에서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이라는 명당자리다. 후손도 없이 죽은 단종에게 명당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했지만, 비운의 죽음으로 짧은 일생을 마친 단종이 편히 쉬라고 하늘이 내린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스쳐갔다.

단종의 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영월의 노인들은 59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으나 열쇠를 쥐고 있는 엄홍도의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때 영월군수였던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노산묘를 찾았다고 한다.

1516년 12월 노산묘는 비로소 봉분을 한 무덤을 갖췄다. 정조 15년(1791)에 엄홍도는 공조판서로 증직되고 장릉은 엄홍도정려각이 들어서며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배향하는 배식단(配食壇),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충신단 등 조성물이 설치됐다.

▲ 단종이 잠든 능침.
ⓒ 한성희
단종은 1698년 숙종에 의해 240년만에 복위돼 문인석과 장명등 등을 갖추고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사각 옥개석 장명등은 장릉에서 처음 나타난 양식이다. 복위 왕릉이라 무인석이 생략되고 석물도 작다.

"볼 것도 없네!"
"그러게 말야."

휙 쳐다보고 서둘러 내려가는 나이든 관광객들이 주고받는 말이 들렸다. 복위 왕릉이니 왕릉치곤 초라한 모습이라 명성에 비해 실망했다는 뜻이리라.

▲ 장릉은 갈룡음수형이라는 명당이고 능침이 있는 곳이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 한다.
ⓒ 한성희
▲ 문인석
ⓒ 한성희
단종의 능침 앞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드렸다. 마음 같아선 큰절을 4배 하고 싶었지만 관광객들이 오가고 있어 인사로 대신했다.

시커멓게 타 들어가던 단종의 심정인 듯 검게 변한 무인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장릉 능침은 비록 어느 관광객의 말처럼 '볼 것도 없이' 조촐해 보일지 몰라도 저 아래 정자각과 배식단, 충신단. 엄홍도정려각 등 충신을 배향하는 건물로 들어차 있어 어느 왕릉보다 많은 건물이 있다.

능침을 내려와 홍살문으로 들어섰다. 정자각을 향해 직각으로 꺾어진 참도가 아버지 문종의 현릉과 같다. 꺾인 참도가 드문 조선왕릉에 문종의 현릉은 두 번 꺾였고 아들 단종의 장릉은 한 번 꺾이는 것은 우연일까, 의도적일까?

12세로 왕위에 오를 때부터 단종의 비극은 정해졌다.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과 수양대군의 마찰은 예정된 것이었다. 태종이 외척마저 몰살하면서 눌러 놨던 신권이 12살 어린 왕을 둘러싸고 있어 왕권이 흔들릴 것은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욱이 단종에게는 뒤에서 수렴청정할 대비조차 없었기에 어린 왕을 보호할 왕실 어른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직각으로 꺾여있다.
ⓒ 한성희
▲ 장릉은 충절의 상징인 왕릉이라 다른 왕릉과는 다르게 충신들을 배향하는 배식단과 충신단이 능안에 있다.
ⓒ 한성희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보는 시각은 두 가지로 갈라진다. 인륜을 저버린 왕위 찬탈이라는 비난과 조선 전기를 탄탄하게 올려 놨다는 시각이다. 세조 이후로 성종과 연산군 시대까지 평탄하게 태평성대로 내려간 조선 전기는 분명히 세조의 공이다.

성종대에 이르러 평화로운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되자 성종 말기에는 방탕한 사회풍조가 나타났고, 과부대비들을 모시느라 허구헌 날 연회를 베푼 성종을 보고 자란 연산군이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짐작이다.

▲ 충신들을 배향하는 사당이 장릉 곳곳에 있다.
ⓒ 한성희
장릉을 둘러보자 이곳 영월사람들이 옛부터 단종에게 지극한 충절과 섬김을 다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영월 곳곳에 남아 있는 단종의 전설과 단종을 모시는 서낭당, 사당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장릉 재실만 해도 지금까지 본 재실 중에 가장 컸다. 왕릉이 가장 많은 동구릉의 재실보다 더 컸으니 영월 사람들의 정성이 아니겠는가 싶다.

▲ 재실
ⓒ 한성희
장릉을 나와 태백산 쪽을 바라보면서 단종이 죽어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을 생각해 본다. 태백산을 오르다 보면 산 중턱에 단종의 사당이 있어 500년이 넘은 전설을 이어가고 있다. 금성대군 또한 소백산 산신이 됐다 하는 전설이 있으니 조카와 숙부가 같은 운명으로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의 소망이 그리 나타난 것일까. 장릉을 되돌아 보면서 수백년 전 죽은 소년왕의 슬픔이 지금도 느껴지는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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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생, 현 파주저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