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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충북 괴산읍으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오일장에 맞춰 간 날이라 시장 구경도 할 겸 이 골목 저 골목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다니던 중 골목 한 쪽으로 보기에도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목조 건물 하나가 눈에 띄였다. 얼핏 보기에 일본식 건물처럼 생긴 그 건물은 대문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옆에 '제일양조장'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 일본식 건물로 지어진 양조장
ⓒ 염종호
'얘야 후딱 가서 막걸리 한 되 받아 오니라~'하는 그런 기억이 내겐 생소하다. 아니 아예 없다. 서울에서 자라 서울에서만 컸으니 술 심부름이라고 해봐야 고작 소주나 사오는 것 말고는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니 양조장은 더더욱 모를 수밖에.

단지 커가면서 사귀는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간접적으로 들은 것은 있었지만 실제로 양조장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온 일이란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시골 읍내에서 말로만 듣던 양조장이라는 간판을 보았으니 얼마나 흥미진진한 상상들로 내 마음이 들떴을까.

▲ 한 평생을 막걸리 제조에 바친 권오학 님
ⓒ 염종호
그런 건물은 이층구조로 된, 창문이 숭숭 나 있는 아주 오래된 일본식 건물이었다. 이런 일본식 건물들이 이곳 괴산 읍에는 아직도 몇 채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간판에 새겨져 있는 번호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전화번호가 단 세 자리인 '105번'.

이는 아주 오래 전 초창기에 있던 전동식 전화기로 손잡이를 몇 번씩 돌려서야 걸렸던 그 시절에 부여 받았던 번호란다. 그렇게 이곳 양조장의 역사는 깊었다. 지금 계시는 분만 해도 사십여 년을 넘게 이 일을 해왔다고 하는데, 들어올 때 이미 창업 사십여 년이 됐었다고 하니 지금까지 족히 팔십여 년이 넘는, 어언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다.

▲ 둘러져 있는 독들
ⓒ 염종호
한창 전성기 때는 직원들만 해도 16명이나 됐고, 하루에 200말 가량도 냈었단다. 그러나 점차 식생활이 바뀌고 읍내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물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 맛이나 오래된 고객은 여직 그대로란다.

안쪽의 넓은 마당에는 막걸리 상자부터 반죽할 때 쓰인다는 이름 모를 기계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언뜻 보기에도 막걸리 냄새가 풍길 듯한 분위기다. 그 안쪽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독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앉아 있는데, 이곳은 막걸리를 발효시키는 곳으로 각 독들마다 예의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탁사 2호 370, 1964. 7.9'

의미를 여쭈어 보니 370은 용량을 말해주는 것이고, 연도와 날짜는 그날 들여온 독이라는 표시란다. 그럼, 이 표시는 1964년 7월 9일에 독이 입고 되었다는 뜻일 터. 어떤 것은 '淸州郡(청주군)'라고 표시된 것도 있으니, 그건 지금의 '청주시'가 되기도 전인 한참 전에 들여온 독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 독은 내 태어난 해에 벌써 여기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니, 이곳의 연륜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겠다 싶었다.

▲ 발효 시 쓰이는 독으로 표시는1964년에 들여 놓은 독이라고 한다
ⓒ 염종호
그 중 한 독에서는 마침 열심히 발효되고 있는 막걸리를 만날 수 있었다. 뽀글뽀글 끓어오르며 농 익어가는 막걸리를 보니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돌아가는 길에 아버님께 그 고향의 맛이라도 전해드릴까 싶어 탁배기를 주문하니, 어르신께서는 손사래를 치며 그냥 가져가라고 막걸리 댓 병을 손수 싸주셨다.

▲ 독에서 정갈하게 발효 중인 막걸리
ⓒ 염종호
그런 생 막걸리의 맛! 그 괴산 막걸리의 맛은 정말 남달랐다. 아주 오래 전에 할머니께서 명절 때면 안방 구들장 위에 독을 갖다 놓으시고, 며칠 동안 뜸을 들여 발효시켜 담가 주셨던, 달착지근하면서도 텁텁하지 않은, 그런 맛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 다음날 뒤끝도 없는 것이.

▲ 생 막걸리의 연한 빛깔
ⓒ 염종호
빛깔 또한 서울 것처럼 허연 우유색이 아니라 마치 산모가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젓을 낸 것 같은 그런 연노란 빛깔이었다. 그 연유는 서울처럼 자동식이 아닌 수동으로 일일이 거르고 뜨는 작업으로 완전히 발효시켜 숙성해낸, 그야말로 일일이 정성어린 손길로 가득 담겨서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괴산 막걸리를 제조하는 양조장은 괴산 읍내에서 읍사무소를 향해가다 보면 '제일양조장'이라 쓰여진 간판과 함께 일본식 건물이 바로 보인다. 혹여 못 찾더라도 물으면 모두 다 안다. 모르면 간첩이란 소릴 들을 정도로 읍내에서는 유명하다. 값은 도매로 한 병에 천 원가량이며 스무 병이 한 상자다. 택배로도 주문이 가능하단다.

제일양조장 <괴산 생막걸리> 
전화 (043)832-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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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브리태니커회사 콘텐츠개발본부 멀티미디어 팀장으로 근무했으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스마트스튜디오 사진, 동영상 촬영/편집 PD로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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