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가 늙어가는 것인지 전에 없던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아내를 부르지도 않았는데 "당신 나 불렀어요?"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하고 다가와 묻는다. 바람소리나 TV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내가 부른 줄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런 증세가 더욱 빈번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내가 내게 말한 적이 없었는데, 며칠 전에 혹은 어제 저녁에 틀림없이 내게 "이런 저런"말을 했다는 것이다. 우기는 데는 장사 없다고 내 건망증도 만만치 않으니 아내가 그렇게 우기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우리 교회 청년 한 사람이 결혼을 했다. 내가 명색이 시인이라고 축시를 낭독하게 되었다. 나는 일반 사람들이 듣고 이해하기 쉬운 시 한 편과 조금 고심의 흔적이 묻어나는 시 한 편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갔다.

▲ 20년을 함께 산 아내. 부산 역 광장에서.
ⓒ 박철
결혼식장은 시장바닥마냥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결혼 주례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절반은 듣지 않고 떠들고 있다. 이럴 때는 참으로 난감하다. 순서에 내 이름이 적혀 있으니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누구나 듣고 이해하기 쉬운 산문에 가까운 자작시를 낭송했다. 등에서 진땀이 흐른다.

결혼식을 다 마치고 우리 교회 교우들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계신 교우 병문안을 하기로 했다. 아내는 중고등부 교사인데 토요일 중고등부 모임이 임박하다고 해서 승합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토요일이라 차가 밀려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병원 가까이 도착하게 되었다. 나는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려고 성경책과 양복저고리를 찾는데 양복저고리가 오간 데가 없다. 분명히 입고 탄 것 같은데 차에서 없어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에 타고 있는 교우들에게 "내 저고리 못 봤냐?"고 물으니 아무도 못 봤다고 대답을 한다.

'아뿔싸! 그렇다면 결혼식장에 벗어 두고 왔단 말인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양복저고리를 벗어 두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건망증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여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양복저고리를 찾느라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교우 중 한 분이 작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아까요, 목사님이 저고리를 벗어서 사모님께 주시는 것 같았는데…."
"네?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요."
"근데 저도 긴가민가해서요."

'그럼 이 여자가 승합차에서 내리면서 내 양복저고리를 가지고 내렸단 말인가?'

하도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마침 아내가 집에 막 도착하여 숨넘어가는 소리로 수화기를 받는다.

"당신 내 양복저고리를 가지고 갔소?"
"그래요."
"아니, 왜 남의 양복저고리를 가지고 갔어? 지금 병문안 가야 하는데 양복저고리도 안 입고 꼴이 우습지 않소?"
"내가 차에서 내리고 보니 택시가 바로 앞에 와 있잖아요. 그래서 얼른 탔지. 얼마 가다 보니 당신 양복저고리를 내가 안고 있잖아. 그러니 어쩌겠어, 하는 수 없이 왔지요."

차 안에서 전화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교우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살다보니 별 일을 다 겪는다. 그래도 아내는 당당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내의 나이가 올해 쉰(50)이 되었다. 20년을 나와 꼬박 함께 살면서 수도 없이 속을 태웠을 것이다. 20년을 함께 살아준 것을 고맙다고 생각하란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내가 평소 얼마나 아내를 찾았으면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당신 나 불렀어요?"하고 묻겠는가? 멍하게 사는 것이 아내의 생존 비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에 그렇게 부지런하고 똑똑했던 여자가 많이 꾸물꾸물해졌고 멍해졌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머릿속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인다. 화장을 안 한 얼굴에는 전에 없던 기미도 많이 끼였다. 아직 손자는 보지 못했지만 할머니 나이가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 두 사람 잘 맞춰 살라고 건망증을 선물로 주신 것 같기도 하다.

물 흐르듯이 사람도 늙어간다. 늙어가는 일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나와 아내도 예외는 아니다.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 기쁨일 수 있다. 뒤를 돌아보면서 덧없음의 눈물만 흘리거나 남을 원망하면서 삶에 대한 허무감에 젖지 않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성스러운 존재와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일구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