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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을 살려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허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린다 할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의 틀을 작가가 임의대로 해체할 수는 없다. 길고 난다는 소설일지라도 이야기는 엄연히 역사의 그 틀 안에서 돌고 돌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 여정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기나긴 여정을 뚫고 세상의 빛을 본 소설은 그 자체로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김별아 장편소설 <미실>은 일단 흥행 요인을 갖고 있다. 사실 1억원의 상금을 내걸었던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라는 점에서도 흥행 요인을 찾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상금이 많은 문학상 수상작'보다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 더 주목하고 있다.

김별아가 주목한 인물은 누구인가? 제목 그대로다. 신라 시대의 여인 '미실'이다. 미실은 '화랑세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신라의 여인이다. 역사 이야기를 감칠맛나게 하는 것으로 소문난 김탁환의 인물들에 비하면 김별아의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의 저자 김훈에 비하면 역사의 빛과 같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작업의 수고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김별아는 한 여인을 재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 속의 어떤 '팜므파탈'보다 위협적인 여자, 여러 자식들에게 사랑받는 어머니, 세 명의 왕을 움직일 수 있었던 권력자, 제도와 관습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움직였던 강력한 자아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미실이 김별아의 <미실>을 통해 천오백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숨결을 부여받았다.

"스스로 생명을 얻어 살아 있는 눈빛은 과거를 잊게 하고 미래에 저당 잡힌 현재를 가벼이 해방시키는 영묘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누구도 미실의 눈을 마주하면 순간을 장악하는 신기에 압도당하여 온몸을 관통하는 저릿한 느낌을 받곤 하였다. 그것이 미실의 힘이었다." <미실> 중에서

미실은 신라 시대 왕실을 위해 '색'을 바치는 운명을 지닌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이자 스승인 옥진으로부터 색에 대한 것을 깨닫고, 다스리는 법을 배우며, 정복당하지 않고 지배하는 정신을 공부했다. 물론 그것은 미실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신라시대의 골품제도가 그러했듯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굴레였다.

미실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치마가 펄럭이면 세상은 무릎을 꿇었다. 경국지색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허나 아름다운 여인이 역사 속에서 한두 명이었을까? 지금 미실을 바라보는 건 문자화된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천하를 휘어잡은 여인의 '당참' 때문이다.

한 명의 왕을 폐위시키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신라시대의 성군으로 알려진 진흥제까지 휘어잡는 무서운 '끼'를 갖고 있었다. 미실이 원한다면 성군도 바보가 될 수 있으며, 바보가 성군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 미실은 그런 힘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진흥제가 졌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당연히 패배했다. 그는 어떤 어리석고 부박한 사내에게라도 일생에 한 번쯤 찾아오고야마는 진실한 사랑에 포박되었다. 실로 어리석고 부박하여 자신이 가진 지위와 명예에 집착하였다가는 놓쳐 버릴 수도 있는 기회였다. 삼한을 통합하겠다는 소망보다, 세속의 전륜왕이 되겠다는 염원보다 덜 우아할지는 모르나 더 절박한 단 하나의 바람에 진흥제는 자기 전부를 걸었다." <미실> 중에서

사람들은 미실을 두고 '팜므파탈'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세에 존재하는 남자들의 시선에서 내린 평가가 아니겠는가. 미실을 보면서 팜므파탈을 논하며 그것에서 비롯되는 여성의 위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이 대신 죽어줄 정도로 사랑받은 사람, 어떤 인간보다 자유로웠던 사람, 본능을 쫓으면서도 사람이었던 미실이 보여주려는 것은 자신을 구속했던 운명과 속박을 희롱하며 세상을 활보했던 그 자유로움일 것이다.

그것은 역사 속의 어떤 인물에 견주어도 낮게 볼 수 없는 매력적인 요인이다. 업적이라고 한다면 권력가들의 색을 채워준 정도로 미비하다. 허나 사람들이 꿈꾸던 삶을 추구했고 개척했다는 점에서 미실을 따라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역사 속의 인물을 그려내는 녹록치 않은 작업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훌륭하게 그 일을 해냈다. 그렇기에 천오백여년의 시간이 갖고 있던 긴 공백은 봄에 눈 녹듯 독자가 미실을 만나는 순간 사라지고 없다.

<미실>은 생동감이 넘친다. 미실이라는 인물을 바로 옆에서 보는 것처럼 인물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또 한번 역사와 현재를 하나로 만드는 소설 특유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무삭제 개정판

김별아 지음, 해냄(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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