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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삼릉으로 들어오는 언덕길.
ⓒ 한성희
경기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국적이면서도 그리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키 높은 포플러가 양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순정 만화의 풍경 같기도 하고 수채화로 그린 그림 같기도 하다.

▲ 마사회의 양보로 얻은 서삼릉 진입로와 종마목장 입구.
ⓒ 한성희
그러나 이 아름다운 길이 계속 이어진 언덕을 넘어 서삼릉 입구에 들어서면, 서삼릉 출입구보다는 젖소 개량부가 있는 농협중앙회 철제 입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삼릉과 붙어 있는 한국마사회의 종마목장 포장길이 눈에 띄게 쭉 뚫려 시선을 붙든다. 세번째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서삼릉 입구다.

어째서 고양시의 대표적인 사적인 서삼릉이 이런 초라하고 한심한 입구를 가진 것일까? 그러나 이나마도 한국마사회에서 1998년 문화재청에 3천 평을 양보해서 겨우 생긴 진입로다. 그 이전에는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 희릉의 홍살문까지 마사회 땅으로 들어차 있었다.

원래 135만 평에 달했던 서삼릉이 능역을 다 빼앗기고 구걸해서 출입구를 간신히 얻을 정도의 신세로 전락한 이유는 군사정권과 무관하지 않다. 135만평 중 현재 8만여 평이 남아 있는 서삼릉의 수난이 시작된 것은 60년대부터다.

서삼릉이 몰락한 이유는?

군사정권 시절, 1963년 우선 한양골프장에 20만평 부지를 뚝 잘라 내준다. 그리고 그 이후 1984년까지 마사회 원당 종마목장, 축협 목초지 목장, 농협대학, 군부대, 훈련원 등에 선심 쓰듯 마구 내주면서 전체의 94%인 127만평이 잘려나갔다.

이 과정에서 1970년 서삼릉 전체를 관리하던 재실까지 낙농단지에 편입돼 헐려버렸고, 현재 관리 사무소로 쓰는 작은 한식 목조 건물을 대신 세웠다.

▲ 효릉으로 가는 길. 축협 소유라 허락을 받아야 하며 초지 가운데 드물게 소나무들이 있다.
ⓒ 한성희
이 덕분에 희릉과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은, 말과 젖소가 뛰어 노닐며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푸른 초지로 둘러싸인 목가적(?) 왕릉 신세가 됐다.

서삼릉에는 예릉과 희릉, 효릉 외에도 의령원, 소경원, 효창원의 세 원과 태실, 폐비 윤씨의 회묘, 공주와 옹주, 후궁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공동묘지라고 굳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일제에 의한 왕실수난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축협 소유지로 둘러싸여 출입이 불가능하기에 효릉은 비공개 왕릉이다.
ⓒ 한성희
얼마나 철저하게 땅을 잘라서 내주었는지 소경원과 효릉으로 가려면 진입로가 축협 소유의 땅이라 해서 서삼릉 관리소조차 축협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구제역을 염려해 소독절차를 거치고 들어가는 일도 있다. 땅 내주고 문화재청에서 출입허가를 구걸하는 꼴이다.

또 태실과 왕자, 공주, 후궁들의 공동묘지를 가려면 차를 타고 7∼8분 가량 돌아서 가야 한다. 효릉과 이 지역들이 비공개로 되어 있는 건 축협과 농협, 마사회의 소유의 땅들이 들어차 있어서 외딴 섬처럼 여기 저기 간신히 자리만 영위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군사정권은 시범낙농단지 조성을 한다는 이유로 축협과 농협에 나눠준 결과, 서삼릉 경역의 대부분이 낙농 방목 초지로 바뀐다.

▲ 홍살문 입구까지 축협소유라서 철조망으로 막힌 효릉은 홍살문 출입이 불가능하다.
ⓒ 한성희
이 때문에 울창했던 숲은 사라지고 예·희릉 구역, 효릉 구역, 후궁·왕자·공주묘, 태실집단 구역, 소경원 구역으로 분할돼 버렸다. 각 권역은 서로 통행할 수조차 없는 고립상태에 있어 출입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135만 평을 다 빼앗기고 겨우 8만 평도 남지 않은 서삼릉의 능역 중 5만 6000평은 비공개 지역으로 고립돼 시민들이 문화재 관람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도 고양시에서 430억원을 투입해 축협, 농협에게 땅을 사들여서 2007년부터 서삼릉을 복원하며 30만 평 시민공원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밝히고 이를 추진하고 있어,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 장경왕후 능상에서 본 종마목장. 능 둘레에 붙어 있어 하얀 울타리가 빤히 보인다.
ⓒ 한성희
하여간 서삼릉 입구부터 정신 사나웠던 심정은 희릉에 올라서서 능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종마목장의 초지를 보자 더 울화가 터졌다. 군사정권의 무지함이 어찌 능뿐이겠는가. 문화재 훼손 뿐 아니라 민족문화 말살에도 한몫 단단히 했지만 이제라도 부지런히 회복하는 수밖에.

서삼릉은 일제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난을 겪은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실 비하를 위해 전국의 태실과 공주 왕자 묘를 한 곳에 몰아 공동묘지를 만들었던 일제도 땅을 마구 내주는 몰지각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 일제가 전국 명산에 묻혀있던 태실을 한 군데로 모아들인 조선왕의 태실.
ⓒ 한성희
문화재청 공릉관리소와 서삼릉 관리소의 협조 덕분에 최근 들어 두 차례나 비공개 지역 취재를 할 수 있었지만 올 때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람?'하는 분통이 가시지 않았다. 문화재법이 상위법이면 뭐하나? 왕릉 주위에 젖소와 종마가 뛰어노는 신세가 될 정도로 힘이 없는데.

하나 같이 비극적인 삶을 산 서삼릉에 묻힌 주인공들의 수난이 수백 년 뒤에도 계속 되는가? 문정왕후에게 독이 든 떡을 받아먹고 죽은 인종과 중종과 나란히 잠들었다가 문정왕후에 의해 남편을 졸지에 빼앗기고 홀로 있는 장경왕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희생당해 허수아비 왕이었던 철종, 아버지 인조에게 독살 당한 소현세자 등등.

남편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폐비 윤씨와 일제에 의해 잠자던 무덤이 졸지에 파헤쳐져 옮겨온 왕자와 공주, 후궁들의 묘지에 이르기까지, 비운의 서삼릉이 초지 속에 고립된 섬 신세를 벗어날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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