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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성당 성탄제에서 연극 공연을 하기에 앞서 출연자가 인삿말을 하고 있다.
ⓒ 지요하
최근에 색다른 경험을 하나 했습니다. 연극을 해본 일입니다. 극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주요 배역까지 맡았으니, 1인 3역을 한 셈입니다. 연말의 바쁜 상황 속에서도 매우 재미있게 해본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연극을 해본 경험(?)을 회억하자면 40년 하고도 수년 전, 저 먼 소년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옛날의 촌락 풍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골 동네에도 종종 악극단이란 게 들어와서 읍내 시장 한편에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하곤 했지요. 당시에는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 영화도 물론 종종 들어오곤 했지요. 악극이든 영화든 돈을 내고 들어가서 구경을 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몰래 천막 밑으로 개구멍치기를 해서 구경을 한 기억들이 더 또렷합니다.

가끔 규모를 갖춘 약장수들이 와서 적당한 공터에 무대를 설치하고 약을 팔며 악극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물론 공짜 구경이니 언제나 구경꾼들은 많았지요. 정말 그것도 구경이라고 도시락까지 싸들고 ‘약장수 구경’을 가는 사람들도 많았답니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보다 농촌에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고….

아무튼 공짜로 보는 약장수 구경이든, 돈을 내고 들어가거나 개구멍치기를 해서 본 악극이든 영화든, 그 특별한 구경을 한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 자랑거리를 한 보따리씩 안고 가는 셈이었지요. 그 아이들이 학교에서 신나게 ‘구경 자랑’을 하며 배우 흉내까지 낼 지경에 이르면 그 아이를 둘러싼 아이들은 그것 자체가 또 신나는 구경거리였지요.

나는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구경 자랑을 많이 했던 듯싶습니다. 열심히 구경 자랑을 할뿐만 아니라 신나게 배우 흉내까지 내곤 해서 그것 자체로 여러 아이들은 물론이고 동네 어른들한테도 구경거리를 선물하곤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나는 악극이나 영화를 보고 온 그 구경 자랑과 배우 흉내로만 그치지 않고, 언젠가 한번은 동네에서 연극 공연을 하기에 이릅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꼬맹이 시절에 그런 일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어귀 한곳에다 밀집 방석으로 움막을 만들고 그 안에 제상을 차려놓고 산신령님께 제를 올리곤 했지요. 긴긴 겨울밤 자정까지 기다리는 것이 큰 고역이긴 했지만, 어른들이 제 지내는 것을 구경하고 나서, 제 지내기 직전에 쪄서 내온 떡시루를 지켜보며 군침을 삼킨 보람으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떡을 받아먹는 맛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별미였지요.

그런데 나는 전등도 없던 그 시절에 한겨울인 정월 대보름날의 긴긴밤을 자정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를 지내기 위해 지어놓은 그 움막에서 연극을 해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극을 하면 연극을 하는 아이들이나 구경을 하는 어른들이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지루함을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지요.

일단 동네 꼬맹이들을 규합했습니다. 동네에서 골목대장을 많이 한 내 제의에 반대를 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모두들 호기심을 갖고 찬동을 했습니다.

나는 일단 아이들에게 골고루 배역을 맡겼습니다. 그 동안 누구보다도 악극과 영화를 많이 본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내 나름으로 꿰맞춘 극중 상황을 열심히 설명해 주고 이놈저놈에게 연기 지도를 했지요. 각각의 대사를 입으로 들려주면서, 너는 이때 들어와서 이렇게 해라, 너는 이때 탕탕 총을 쏘아라, 너는 이때 총을 맞고 으악! 하고 죽어라….

말하자면 내가 극본을 짓고, 연출을 하고, 주요 배역까지 맡은 셈이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고작 하루나 이틀 정도 벼락치기로 준비를 했던 것 같습니다.

▲ 연극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다>의 한 장면
ⓒ 지요하
그리고 드디어 정월대보름날을 맞았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두어 놈 데리고 온 동네를 다니면서 연극 선전을 했습니다. 신문지를 구해 말아서 핸드마이크처럼 만들고는, 악극단이나 영화가 들어왔을 때 선전원이 선전을 하고 다니는 것처럼 큰소리로 신나게 연극 선전을 해대었지요.

어느덧 정월 대보름달은 휘영청 떠올랐고, 날씨는 매우 온화하여 겨울밤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돕는 듯이 모든 조건이 더없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동네 아주머니들이며 어른들이 마을 어귀 산신령님께 제를 지낼 움막 앞으로 초저녁부터 모여드는 것이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조명 역할을 해주겠다, 움막 안의 벽에 붙어 있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산신령님 그림이 무대 분위기를 만들어주겠다, 징도 하나 구해다 놓았겠다, 이제는 연극 공연을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배역을 맡은 기철이 기목이, 영섭이, 영석이, 정호에다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이들이 약속된 시간에 모두 모였습니다.

드디어 징이 울리고 연극은 시작되었습니다. 맨 먼저 내가 움막 안으로 등장을 하고, 의자에 앉아서 뭐라고, 뭐라고 독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연극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움막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배역을 맡은 아이들이 제때에 등장을 하지 않는가 하면, 다음에는 네가 나갈 차례라느니 내가 나갈 차례라느니 다투지를 않나, 움막 안으로 등장을 하고서도 대사를 까먹은 바람에 우물쭈물해서 김빠지게 하지를 않나, “얀마, 빨리 총을 쏴야지. 빨리 총 안 쏘구 뭐허는 겨?”하고 대사에도 없는 말을 하지를 않나, 연극은 완전히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구경꾼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더욱 재미있어 하고, 그런 낭패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연극은 끝내 흐지부지 끝인지 뭔지 모르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어른 구경꾼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꼬맹이들이 연극을 할 생각까지 다하고 참 용하다느니, 기특하다느니, 애들이 저러니까 더 사는 맛이 난다느니…. 요즘 말로 하자면 참 영양가 있는 말들이 많았지요.

생각하면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의 더께가 쌓여 있다니…. 추억이라는 것은 결국 덧없는 세월, 인생무상을 반추하게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나는 연극이라는 것을 접할 적마다 으레 소년 시절의 그 한 토막 추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며 혼자 슬며시 미소를 짓곤 하지요. 그 추억으로 하여 연극이라는 예술의 한 장르는 내게 좀 더 정다운 것인 듯도 싶습니다.

그 동안 내 나름으로는 연극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방에서 사는 처지임에도 서울로 연극을 보러 간 일도 꽤 많습니다. 유명 연극배우를 인터뷰하거나 지방의 여러 개 극단을 탐방 취재하여 글을 쓴 적도 제법 많습니다.

그리고 더러 연극 대본도 써서 2000년에는 <천안극단>이 내 희곡으로 56회 정기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천안극단>이 내년 정기공연 작품으로 오리지널을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최근에 또 한편의 대본을 주었지요.

성당에서 연극 공연을 한 경험도 있답니다. 1980년 성탄 때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천주교 박해시대의 풍경을 그린 연극을 공연한 적도 있지요. 지금은 대개 40줄에 들어선 그때의 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하고 멋지게 연기를 했는지…. 그리고 나는 눈을 밟고 시골 마을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옛날 노인들의 갓을 구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생각하면 아련해지는 그때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그런 내가 올해 또 한 번 성당에서 연극이라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23일(금요일) 저녁에 있었던 ‘2004성탄제’ 행사에서 10분짜리 단막 소품을 공연한 것이지요.

처음에는 연극 같은 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지요. 해마다 성당에서 갖는 성탄제 행사에 참가하는 구역들은 한 결같이 코믹한 분장에 의한 익살이나 무용연기, 또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바꾼 노래 부르기가 전부였지요. 그리고 우리 구역은 해마다 노래 말을 바꾼 민요나 가요로 합창을 했는데, 매번 참가인원수로 점수를 따곤 했지요,

올해도 그런 식으로 적당히 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성탄제를 불과 며칠 앞둔 날 구역장 자매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는 이웃 구역과 함께 연극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10분 정도 할 수 있는 연극 대본을 써주고 연출에다가 주요 배역까지 맡아달라는 것이었지요.

연말에 즈음하여 이런저런 소소한 일들이 너무 많아 난감한 마음이었으나 항상 수고가 많은 구역장 자매님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지난 21일 주일 새벽에 A4용지 4장 분량의 극본을 만들고, 20일 저녁에서야 우리 구역장 자매님 댁에 2개 구역 신자들이 다수 모인 가운데서 극복 발표를 하고, 배역을 정하고 소품에 관한 의논을 하였지요.

그러니까 20일부터 22일까지 3일 동안 벼락치기로 연습을 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지요. 나는 극본을 만든 데다가 연출도 맡고 주요 배역까지 맡은 바람에, 22일 새벽 서울에 갔다가 서둘러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내려와야 했고….

연극은 한마디라도 대사가 있는 배역은 아홉 명이지만 엑스트라가 많을수록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많은 신자들이 함께 무대에 오를 수가 있었지요. 대사가 있는 배역에 남자 성인 신자도 다섯 명이나 참가했고, 어린이들도 참가하여 겉모습부터 보기에 좋았지요.

대사가 가장 많은 배역은 대천사와 연옥으로 갓 들어온 영혼이었는데, 그 역은 나와 내 제수씨가 맡았지요. 그런데 제수씨는 대사를 열심히 잘 외웠는데, 공연 때는 조금 실수를 하기도 해서 내가 일부러 대본에 없는 대사를 하여 관객의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했지요. “대사를 열심히 잘 외웠으나 더러더러 잊어먹기도 하는구나”라고….

연극은 10분에 불과한 짧은 극이었지만 메시지가 분명해서 신자들에게 뭔가를 준 것 같았습니다. 메시지 전달이 잘된 덕인지, 올해의 성탄제는 가슴에 남는 것이 있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연극 공연을 마치고 나서 출연진이 인사하는 모습
ⓒ 지요하
나는 이번의 10분짜리 짧은 연극을 짧은 동안 준비하고 공연하면서 지난 세월을 반추해볼 수 있었습니다. 거지반 50년이 다 되어 가는 저 소년시절 정월대보름 밤의 움막 무대도 떠올려볼 수 있었고, 1980년 ‘광주사태’의 뼈아픔을 짓누르며 성당에서 저 박해시대의 풍경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했던 일도 다시금 반추해 볼 수 있었지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네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생각도 슬며시 했지요.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내게 주어진 배역을 어떻게 소화하며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해야 할 것인지, 결국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호한 의문들이 자꾸만 내 의식의 언저리를 맴도는 것 같더군요.

하여간 올해는 무려 24년 만에 내 손으로 연극을 만들어보았고, 또 무려 사십 수년 만에 내가 연기라는 것을 해본 해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올해의 한 가지 의미일 듯싶군요. 인생이라는 거대한 연극 무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음으로써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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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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