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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종종 책을 골라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우리 애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무슨 책을 읽게 해야 할까요?', '친구가 결혼하는데 선물로 어떤 책이 좋을까?', '회사 다니기 싫다는 후배한테는 무슨 책을 권해 주면 좋을까?', '임신한 여동생에게 무슨 책을 사 줄까?' 뭐, 이런 등등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참 곤혹스럽다.

수많은 출판 평론가들, 도서 평론가들이 나름대로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골라 놓은 책 목록들도 구체적인 도움을 원하는 그이들 앞에서는 지나치게 광범위해서 오히려 선뜻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게 하기 일쑤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림책을 권하는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열의 여덟 정도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림책을 통 보지 못하고 자랐다. 언니, 오빠들이 보는 참고서말고는 제대로 된 동화책 한 권이 없었던 내게 최고의 호사는 반 친구네 집에 가서 디즈니 그림책을 실컷 보다 돌아오는 일이었다. 가끔 내 동무는 놀러가서 책만 들고 앉아 있는 나한테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너, 그러려면 우리 집에 오지 마!”

그러면 종이 인형을 들고 좀 놀다가 또 책장 앞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그림책을 보고 있는 순간은 참 행복하다. 어릴 때 채 누리지 못한 결핍감을 이제라도 해소해 보겠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철이 들고, 진짜 어른이 되어 버리기 전에 꼭 읽었으면 싶은 책을 모아 본다. 이 책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다면, 아직 '좋은 어른'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라고 감히 단언하면서.

좋은 우리 문학을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이주홍의 작품을 김동성의 아름다운 그림과 더불어 만날 수 있는 <메아리>를 가장 먼저 꼽고 싶다. 산골 소년 돌이의 순박한 모습을 너무도 잘 표현해 놓은 작품이다. 누나가 시집간 뒤에 친구라고는 메아리밖에 없어서 무지무지 심심한 돌이를 따라다니다 보면, 어린 시절엔 내가 분명히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 있는지 찾아보기 힘든 순정함과 서정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그윽하게 펼쳐지는 김동성의 그림 또한 글과 놀라운 조화를 보여 주고 있다.

김동성의 그림을 맘껏 누릴 수 있는 또 한 권의 책으로 <비나리 달이네 집>이 있다. 글이 승하면 그림이 죽거나, 그림이 승하면 글이 묻히기 쉬운 법인데 <비나리 달이네 집>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저력을 보여 준다. 농사꾼처럼 살아가는 신부님과 다리가 세 개밖에 없는 강아지 달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삶의 가치란 것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교훈을 강요하거나, 읽는 이를 계몽하려 들지 않는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가 지닌 힘이 참 놀랍다.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가운데 들어 있는 <나비를 잡는 아버지>와 <만년샤쓰>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들이다. <만년샤쓰>는 어렸을 때 신동우 화백의 그림으로 일찌감치 읽은 작품인데, 어른이 되어 다시 봤을 때도 가슴에 그득하게 눈물이 고이는 통에 애를 먹었다. 두 작품 모두 가난하고 힘겨운 시절을 밝고 환하게 지나갈 줄 아는 건강한 웃음이 있어서 좋다.

현덕의 작품 <나비를 잡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나비를 잡으려고 애쓰는 아버지의 애잔한 모습이 감동적인데, 김환영이 그린 주인공 바우의 얼굴이 참으로 그럴듯하여 글을 다 읽고 나선 그림만 다시 처음부터 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상상력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그림책

아이들은 쉽게 읽지만, 어른들은 그러지 못하는 그림책들이 있다. 글이 하나도 없는 그림책, 설명 없이 그림으로만 되어 있어서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도통 아무것도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책들이다. '도대체 뭘 그린 거야?' 쩔쩔매면서 그림책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있으면 아이들은 똑같은 그림을 가지고 열 가지도 넘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내게 들려준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이상한 화요일>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개구리랑 두꺼비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상한 광경을 그린 이 그림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도 처음에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민부터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꼬맹이는 첫 장부터 깔깔대며 웃어대기 시작하더니 책장을 덮을 때까지 끊임없이 재잘대면서 저 혼자 이야기를 만들면서 놀고 있었다. 내 자신이 참 한심한 어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구름 공항>도 작가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책이다.

지금껏 존재했던 구름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생각들을 일거에 뒤집어버린다. <이상한 화요일>보다는 좀 더 적응하기 쉬운 그림책이기도 했다, 내게는. 꼬맹이들은 <구름 공항>보다 <이상한 화요일>을 더 좋아라하고, 내 주변의 어른들은 <구름 공항>을 좀 더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은 단순한 검은 선이 얼마나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1982년에 그린 <떠돌이 개>와 그 십 년 뒤에 그린 <거대한 알>을 보면, 연필과 목탄 두 가지 재료만으로 수십 가지 색깔을 입힌 화려한 그림책이 따라오지 못하는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문지르면 금방이라도 손에 검게 묻어날 것 같은 부드럽고도 강한 먹선으로 가브리엘 뱅상은 문명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야기 <떠돌이 개>에 비해 <거대한 알>은 좀 더 오래도록 들여다보아야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무슨 그림인지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읽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그림책이므로, 누구에게나 특별한 체험을 선사해 주는 그림책이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꼭 껴안고 다녔을 정도다. 거인족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슬픈 그림책이지만, 거인들이 존재하던 시절의 아름다운 풍경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감동을 던져 준다. 문명이 불러온 적막함과 폐허가 된 사람들의 마음밭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어서 분노와 끔찍함을 동시에 불러오는 책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슬픈 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마지막 거인>은 손 가까운 곳에 오래도록 놓아두고 늘 보고 싶은 책이 되었다. 조나단 런던의 <회색 늑대의 눈>은 인간에게 쫓겨나 멸종을 앞두고 있는 아름다운 종족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존재, 회색 늑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간에게 경고하고 있는 이 그림책을 읽고도 아무 감정이 없다면 그 사람에겐 아마도 희망이 없는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적어 놓고 보니, 턱없이 많은 작품을 그냥 놓쳐 버린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의 책만이라도 너무 늦기 전에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행복한 책읽기', 그것은 비단 글이 아주 많은 인문서나 교양서 같은 것에만 특별히 통용되는 말은 아니라고 본다. 그림책을 보면서 행복한 겨울밤을 보내는 '좋은 어른'이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메아리

이주홍 글, 김동성 그림, 길벗어린이(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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