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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의 일출
ⓒ 김은주
세 번째 날 6시, 오늘 아침은 혼자 해맞이를 한다. 구름을 뚫고 산 위로 불쑥 솟아오르는 아침 해의 기운을 받는다.

고기잡이 배들이 해의 길을 뚫고 빛을 가르며 바다로 나선다. 이 봄에 떠오르는 해는 한겨울, 집채만한 위용을 보여 주던 그 해에 비하면 크기는 작아도 부드럽고 안온한 기운을 가득 품고 있다.

고요함을 깨고 저 아침바다를 향해,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외치는 젋은 사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콧등이 시큰하다. 아주 많이 어려운 일을 겪고 혼자 이 통영 앞바다에서 새 기운을 회복하려는 안간힘이라 여겨져서,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정성껏 응원했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든 그 마음 다 이루시라, 하고 말이다.

이 섬에 엎디어 세월도 시간도 잊고프네

ⓒ 김은주
광고 촬영지로 유명한 소매물도로 향한다. 오늘도 역시 바다는 반짝반짝 고기 비늘처럼 빛난다. 한없이 투명한 초록의 바다 남해의 쪽빛을 맘껏 누린다. 초록 풀들이 잔뜩 자라난 소매물도 등대섬은 바다 한가운데 거짓말처럼, 그림같이 아름답게 떠 있다.

바람 따라 누웠다 일어나는 풀들의 사각거림을 노래처럼 들으며 가끔씩 떠가는 유람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싶다. 그만 이 섬에 엎디어 세월을 잊고, 시간을 잊고 한참을 살고 싶은 마음이 솟고 만다.

서울 한가운데, 창 밖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를 벗삼아 일하고 있을 사무실 식구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절로 인다. 내가 얻어 가는 좋은 기운을 나누어 주는 것말고는 길이 없다.

▲ 등대섬에서 소매물도로 넘어가는 바닷길이 열렸다
ⓒ 김은주
▲ 등대섬의 등대
ⓒ 김은주
등대섬과 소매물도를 잇는 길이 마침 열려 있어서 바다를 걸어 소매물도로 건너간다. 바위 가득 붙어 있는 돌김을 뜯어 먹기도 하고, 작은 돌멩이들한테 안녕 안녕 인사도 하면서 건넌다. 물때를 잘못 맞추면 등대섬에 갇히기 십상일 것 같은 섬. 그래서 더 사무치는 섬이다.

소매물도 선착장으로 넘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뽈락 젓갈에 삭혀서 사각사각한 맛이 일품인 무와 오징어무침, 김으로 만 작은 김밥에 막걸리 한 잔 곁들이니 저절로 터져나오는 "캬~" 소리를 막을 재간이 없다. 우리나라 최고 품질 미역이라고, 소매물도 미역 안 사 가면 후회할 거라는 할머니 자랑에 몇 사람이 미역을 산다.

미역 장사하시는 할머니 곁에서 고기를 팔던 말 못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오래 마음에 맺힌다. 상처도 많으셨을 텐데 그 웃음에 조금의 구김살도 없어서 오히려 더 아팠던 것은 내 편견이겠지만…….

통영에서 보낸 짧고도 긴 사흘

▲ 소매물도에서 바라본 등대섬
ⓒ 김은주
소매물도를 떠나 작은 섬 장사도에 잠깐 들렀다. 1가구에 주민 2명이 사는 섬이라는데, 지금은 식물원으로 개발 중이다. 개발된 모습이 외도와는 많이 달랐으면 좋겠다. 2008년에 공사가 완료될 예정이라 하는데, 이 섬의 주인이 우리 식물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는 식물원으로 꾸밀 생각이라 하니 기대해 볼 일이다.

섬 한켠에서 가만히 낡아 가는 작은 학교도 만났다. 천장이 무너져 예전에 교실이었던 학교 안에 환하게 햇살 비친다. 이 곳을 거쳐 간 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치고 말았지만, 학교 혼자서도 별로 심심하지는 않겠다 싶다. 키 높이 자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참식나무들이 바스락대며 나누는 이야기가 정겹다.

저 혼자 낡아가는 교회 종을 뎅뎅 쳐 보면서 작은 바람을 담는다. 외롭지 않은 섬이 되기를, 자연스럽게 꾸며지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소박하면서도 웅숭깊은 모습으로 꾸며서 보는 이들의 마음자락을 순하게 여며 주는 그런 식물원이 되기를.

▲ 장사도에서 낡아 가는 종
ⓒ 김은주
통영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바다 가득 잠자리처럼 가볍게 떠있는 요트 떼를 만났다. 1년에 한 번 있는 요트 대회란다.

가볍게 바람을 안고 달리는 배가 있는가 하면, 어쩌다 뒤집혔는지 바닷물 퍼내느라 정신 없는 배도 있다. 몹시 이국적인 풍경이다. 요트를 모는 건강한 젊음은 나쁘지 않아 보이네.

통영에서 보낸 사흘은 참 짧고도 길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도 내 몸은 요람처럼 나를 흔들어 주던 파도를 잊지 못하고 바다의 꿈을 꾸었다. 흔들리지 않는 땅에서도 바다를 기억하는 내 두 발 역시 괜히 허청대고는 했다.

서울에 가득한 사람들은 내가 보내 사흘을 꿈결처럼 느끼게 했지만, 뭐 어떠랴, 한려해상에 보낸 시간의 기억은 내 책갈피에서 말라가는 붉은 동백꽃이 모두 담아 두고 있을 터인데…….

덧붙이는 글 |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우리나라 첫 번째 국립공원인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4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4월 17일부터 국립공원 지역의 도보순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 13일까지 8주 동안, 주마다 5일씩 국립공원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제가 참가한 구간은 2주차(4월 23일-4월 25일) 구간 가운데 3일이었습니다. 일반인의 참가 신청도 받고 있지요. 자세한 일정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http://www.knps.or.kr/)에 들어가서 ‘국립공원 40일 도보순례단’을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4월 25일의 기록입니다.


태그:#소매물도, #장사도, #통영, #국토순례, #아침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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