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묘사를 지내기 위해 간단하게 차린 음식
ⓒ 이종찬
"식사는 했어요?"
"아니 왜요?"
"아, 때가 되었으니까 한번 물어 보는 거지요."
"난 또, 뭐 맛있는 거라도 해 놓고 퍼뜩 오라는 줄 알았네."
"내 차암~ 오늘 매사(묘사) 지내러 가는 날인 줄 알고 있지요? 9시 30분쯤 형님이 그쪽으로 올라갈 거요."


지난 21일(일) 오전 9시, 큰 형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나는 곧장 형님의 차를 타고 경남 진해 명동에 있는 선산에 묘사를 지내러 갔다.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늘 가는 묘사였지만 나는 묘사를 갈 때마다 마음이 설렜다. 모처럼 우리 형제가 모여 어디론가 나들이라도 가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형제가 그리 자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설날과 추석 그리고 조상님 제사와 부모님 제사 때가 되면 늘 만났다. 또한 연말연시와 성묘, 서로의 생일이 돌아오면 늘 같이 모여 맛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피붙이들끼리의 살가운 정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가까운 곳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 적은 없었다. 서로 먹고 살기에 바쁘다 보니 날짜를 맞추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두어달 틈새로 제사를 포함한 집안 행사가 이어지다 보니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 형제의 바깥나들이는 성묘와 묘사가 유일했다.

▲ 묘제(墓祭), 시향(時享)이라고도 부르는 묘사
ⓒ 이종찬
우리 집안(경주 이가(李家) 국당공파) 선산은 창원시 퇴촌동과 낚시터로 널리 알려진 소쿠리섬과 우도로 가는 명동선착장 바로 위에 있다. 그중 해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모여 조상님께 묘사를 지내는 곳은 소쿠리섬과 우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진해 명동의 야트막하면서도 아담한 선산이다.

"우리 조상님들도 묘자리 하나는 기가 막힌 곳을 잡았구먼."
"요 앞에 조선소가 없을 때꺼정만 하더라도 요기(여기) 경치가 울매나(얼마나) 좋았다꼬. 그라고 그때는 매사(묘사)로 지낸다카모 동네 꼬맹이들이 떡 한쪼가리(한조각) 받아 묵을라꼬 길게 줄을 섰다 아이가."


어릴 적,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우리 마을 앞산에서도 흰 두루마기를 걸친 어르신들이 묘지 앞에 여러가지 떡과 음식을 차려 놓고 길게 늘어서서 묘사를 지냈다. 아마도 그때 마당뫼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묘지 앞에 서서 묘사를 지낸 어르신들은 김녕 김씨 집안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마당뫼라고 부르던 그 산이 김녕 김씨 선산이었으니까.

그 당시 우리 마을 아이들은 흰 두루마기를 걸친 어르신들이 마당뫼로 올라가는 모습만 보였다 하면 가시나 머스마 할 것 없이 마당뫼로 달려가 길게 줄을 섰다. 어떤 가시나는 떡을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베개를 어린애처럼 등에 업고 두더기로 푸욱 덮어 씌운 채 숨을 헐떡이며 마당뫼로 달려오기도 했다.

▲ 선산에서 바라본 진해 명동마을과 진해 앞바다
ⓒ 이종찬
왜냐하면 묘사가 끝나고 나면 아이 숫자대로 떡 한 조각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떡을 나누어 주는 아주머니가 애기(베개) 업은 것을 보고도 씨익 웃으며 그냥 지나칠 때도 있었다. 아니, 그 아주머니의 웃음 속에는 '너 베개를 업고 왔구나'하는 것만 같았다.

"요기 알라(아기)도 엎고 있는데예?"
"그으래? 그 알라 그거 누야(누나) 생각 디기(많이) 하네. 옛다! 알라는 오데(어디) 사람이 아이라(아니라) 카더나."
"고맙심니더."
"숨도 못쉬는 알라 그거 인사성 하나는 디기(참) 밝네."
"너거들 인자(인제) 떡도 받고 했으이(했으니까) 앞으로 우리 조상님 묏등(묘지) 잘 지키거라이. 비석에 소 고삐 거튼 거(같은 거) 매지 말고, 묏등 우에 올라가서 놀지도 말고. 알것제?"


사실, 마당뫼 곳곳에 혹처럼 올록볼록 솟아난 그 무덤들은 우리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비석에 소 고삐를 매어 두고 무덤 뒤에 숨어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총싸움을 하면서 놀았다. 가시나들은 무덤 앞에 놓인 반듯한 돌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거나 소꿉놀이를 했고.

그러다 보니 무덤과 무덤 주위에는 반듯한 길이 여러 개 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석에 묶인 소가 무덤가에 소똥을 몇 무더기씩 떨구어 놓는 것은 예사였고, 가끔 뿔로 무덤을 들이박아 무덤 일부가 허물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무덤을 사람이 묻힌 그런 곳이라 생각지 않고 그저 우리들이 놀기 좋게 잔디를 잘 심어 놓은 그런 장소쯤으로 여겼다.

▲ 선산 옆에는 어린 날의 추억을 일깨우는 빨간 까치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 이종찬
"인자 매사 떡도 얻어 묵고 했으이 묏등 근처에서는 놀지 말자."
"그라모 소는 오데(어디) 풀어 놓고, 우리들은 또 오데(어디) 가서 놀끼고?"
"고인돌 주변에 가모 될 꺼 아이가."
"그기는(그곳은) 밭이 많아서 파인데(안 좋은데). 지난 번에 그짜서(그곳에서) 놀다가 우리집 소가 무시(무)로 몇 개 뽑아 묵어 가꼬 혼땜 했다 아이가."


묘사(墓祀). 묘제(墓祭), 시향(時享)이라고도 부르는 묘사는 5대 이상, 그러니까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조상님 산소에 1년에 한 번씩 가서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우리 집안에서도 해마다 음력 시월 중순쯤이 되면 일가들 모두 진해 명동에 있는 선산에 모여 조상님께 묘사를 지낸다.

하지만 요즈음은 옛날처럼 묘사떡을 얻으러 오는 코흘리개 아이들도, 무덤 근처에서 소를 풀어 놓고 노는 아이들도 아예 보이지 않는다. 묘사 음식 또한 옛날처럼 많이 장만하는 게 아니라 간단하게 제를 올릴 정도만 준비하고, 옷차림 또한 흰 두루마기 대신 주름이 잘 잡힌 양복 차림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개발로 인해 선산마저 모조리 사라져 조상님께 묘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우리 집안 선산도 몇 해 전 진해 해안도로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다리가 잘리고 말았다. 그리고 선산 앞에는 바다를 메우고 조선소가 들어서 아름다운 진해 앞바다를 이리저리 구겨 놓고 말았다.

부산 진해에 신항만이 들어서면서 생선회가 맛있기로 이름난 진해의 옛모습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 집안 선산도 언제 밀려날지 모른다고 한다. 어쩌면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찬란한 윤슬을 굴리며 조각배처럼 떠도는 저 멋진 소쿠리섬과 우도도 개발이라는 낱말 아래 그대로 매립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 낚시터로 유명한 소쿠리섬과 우도가 조각배처럼 떠있다
ⓒ 이종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옛 풍습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개발이라는 이름 앞에 모조리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든 제도와 관습을 다시 한번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 깡그리 부수고 있는 것이다. 나쁜 제도와 관습은 꺼리낌없이 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름다운 전통까지 '구태'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버려서야 되겠는가.

"아, 땅덩어리도 좁고 한데 화장을 해서 뿌리는 거 맞지? 근데, 납골당은 또 뭐꼬? 이래 계속가다가는 온 산이 묏등 대신 돌덩이 천지가 될 거야. 묏등이야 오래 되모 저절로 사라질 수도 있지만 납골당은 빼도 박도 못한다 아이가."

"글쎄 말입니다. 저는 집안의 제실을 하나 지어 놓고 조상님들의 위패만 모신 뒤 정해진 날짜에 일가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묘사처럼 제를 올렸으면 합니다. 3대 정도까지는 지금처럼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