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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 조르바> 책 표지
ⓒ 열린책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의 책 <흔들리는 터전>에서 사람들이 왜 많은 공부를 하고도 깨닫지 못하는지, 왜 배우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깨닫는지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가지지 못한 진리는, 죽은 진리입니다. 설혹 그것이 여전히 쓰여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직 사물의 표면에 기여할 따름입니다. 세계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백 권의 책 내용에 정통하고도 그 정신생활은 전과 다름없이 역시 천박하고 피상적인 학도를 상상하여 봅니다.

그 이웃에는, 매일 기계적인 작업에 종사하고 있는 무식한 노동자가 살고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것이 나의 생명실현에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이냐."

이러한 의문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는 심연을 향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저 석학(碩學)의 선비는 과거의 온갖 진리는 알고 있을지 모르나 저 스스로는 아무런 진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소설인 <그리스인 조르바>는 틸리히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아주 멋들어지게 형상화한 책이 아닌가 싶다.

작품 중 등장하는 '나'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지독한 책벌레로 늙은 노동자인 조르바로부터 '두목'이라 불린다. 이 사람, 두목은 마치 세상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제 나름의 진리를 열심히 갈구하지만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오로지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골몰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다.

반면 그가 일꾼으로 고용한 조르바는 학교라곤 문 앞에도 가본 적 없는 노동자지만, 만고풍상을 겪은 사람으로 온몸으로 대지의 비밀을 체득한 자였다. 두목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유의 혼을 조르바에게서 발견하고 그에게 한없이 빠져든다.

이들이 크레타 섬에 들어가 벌인 공식적인 사업은 광산에서 갈탄을 채취하는 거였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기 좋아하는 촌놈들에게 둘러댈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틈틈이 노닥거리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두목과 조르바가 벌이고자 했던 진정한 일이었던 것이다. 두목과 조르바는 틈만 나면 사랑, 자유, 진리, 죽음, 결혼, 여자, 신, 인간, 구원 등 온갖 종교철학적 주제들을 가지고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렇다고 일정한 주제를 정해서 학자들 마냥 골치 아픈 이야기를 쏟아놓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평범하고 유쾌한 일상의 대화를 하다가 심오한 철학적 통찰과 잠언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두목은 원시적 배짱이 두둑한 조르바가 툭툭 던지는 걸쭉한 말들에서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정한 진리와 자유의 빛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까닭에 두목은 조르바의 이야기를 예사로 듣는 법이 없었다.

그의 말들이 피 한 방울 묻지 않고 머리에서 나온 거라면 조르바가 하는 말들은 그가 많은 시간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온몸으로 경험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조르바가 남긴 인상 깊은 많은 어록들 가운데 몇 개만 들춰보자.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디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밖에요. 두목, 나는 최악의 인간도 최선의 인간도 아니오. 중간쯤에 들겠지요. 나는 내가 먹는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쓴답니다. 과히 나쁠 것도 없겠지요."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 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 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씌어져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 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조르바는 종교적 광신과 애국주의가 인간을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빠뜨려왔는가를 자신의 쓰라린 과거 경험을 통하여 잘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는 인간이길 원했고 자유인으로 살고자 몸부림쳤다.

그는 매일 대하는 것일지라도 늘 처음 대하는 듯 경이롭게 바라보았고, 커다란 슬픔 앞에서나 말할 수 없는 기쁨 앞에서는 어김없이 자신의 산투리(기타 비슷한 악기)를 들고서 미친 듯 춤을 추어댔다.

어떤 제도나 규범, 알량한 지식도 그를 붙잡아 매어 둘 수 없었으며, 이것이야말로 조르바가 어린아이와 같이 순백한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게 만든 비결이기도 했다.

조르바는 일을 하든, 여자와 사랑을 나누든, 아니면 춤을 추든 간에 저울질하지 않고 온통 거기에 푹빠져 몰입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근원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지혜자였다.

이에 비해 숱한 책을 읽어온 두목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삶의 태도를 보이면서 조르바의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늘 허둥대곤 했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여자란 무엇인가요?"

"만물은 각기 무슨 의미를 지닌 건가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왜 사람은 죽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 그 이야기를 좀 들읍시다. 요 몇 년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무엇이오?"


실존 인물이었던 조르바는 저자 카잔차키스에게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한다. 그는 힌두교도들은 <사부>로 부르고 수도승들은 <아버지>로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만큼 조르바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이른 사람이었기에 작가의 영혼을 깊이 매혹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 곳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작가는 조르바라는 경이로운 한 인물에 대한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여러 곳에 나타나는 지나친 여성 폄하의 내용은 지각 있는 여성과 남성 독자들로 하여금 불쾌감과 분노마저 안겨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여성은 진리와는 별 상관없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성애적인 동물에 지나지 않다는 편견이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흠을 제한다면, 이 책은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고뇌에 찬 사색을 훌륭하게 맛보게 해주는 아주 진귀한 소설이 틀림없다. 나에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이어 두 번째로, 적절한 소설의 재미와 함께 심오한 종교철학적 사유를 엿보게 해준 책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열린책들(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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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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