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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마산문화문고
ⓒ 현대문학
그 남자네가 안감천변으로 이사온 것은 우리가 그리로 이사간 지 한 달도 안 돼서였을 것이다. 우린 아직 새집이 자리가 잡히지 않아 어수선할 때였다. 어머니가 철물전에 가는데 따라가서 바께스, 쓰레받기, 부삽, 쥐덫 따위 너절한 것들을 들고 오다가 그 남자네가 이삿짐을 부리는 걸 만났으니까.

이사 오는 집 안주인이 먼저 우리 어머니를 보고 반색을 했다. 어머니는 달갑지 않은 얼굴로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다. 허리가 많이 굽어서 그런지 우리 어머니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노마님을 그렇게 데면데면히게 대하는 건 어머니답지 않았다. 어머니의 외가 쪽 친척인데 나이는 노마님이 위지만 항렬로 따지면 어머니가 한 항렬 위라고 했다 ….

마침 짐을 나르던 청년이 우리 곁에서 머뭇대며 아는 척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노마님이 우리 막내라고 인사를 시켰다.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 막내를 보는 노마님 얼굴은 흐뭇한 미소로 주름이 가득해졌다. 손자라야 알맞을 것 같은 나이 차이 때문에 노마님이 좀더 주책맞아 보였다.

청년은 평상복에 교모를 쓰고 있어서 나는 냉큼 그가 어느 학교 다닌다는 것부터 알아보았다. 내가 다니는 여고하고 같은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였다. 당시 광화문을 중심으로 신문로 안국동 계동 수송동 일대에는 열 개가 넘는 남녀 중고등학교가 몰려 있었으니까 그 정도를 무슨 기이한 인연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17~20쪽


칠순을 넘긴 작가가 살갑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첫사랑은 어떤 맛일까. 씹어도 씹어도 씁쓸하기만 한 소태 같은 맛일까? 아니면 파아란 가을하늘을 떠도는 뭉게구름처럼 한껏 부풀어오른 솜사탕 같은 맛일까? 그도 아니면 오래 전에 담근 김치를 꺼내다가 문득 코끝을 시큼하게 찌르는 그런 맛일까.

칠순을 넘긴 작가의 속내 깊숙히 숨겨져 있었던 첫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그가 나를 구슬 같다"고 말한 뒤부터, '구슬'이란 말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구슬 같은 그런 동그란 모습을 띠고 있을까. 보이는 것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이라고 불렀던 그때처럼.

작가는 쓴다. 그 첫사랑은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 날, 난방이 안 되는 서울의 어느 초라한 극장 안에 단 둘이 앉았을 때 그가 " 내 옆에 꿇어앉아 자기 털장갑을 뒤집어서 내 발끝에 씌워"주는 그런 모습이라고. 그리고 "그걸 발끝에 신으면 아무리 꽁꽁 언 발가락도 스르르 녹으면서 훈훈해"지는 그런 포근함이라고.

"지난 여름은 힘이 많이 들었지만 다 쓰고 나니 내 안에서 중요한 게 빠져나간 것처럼 허전하다. 힘든 것도 있었지만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애틋하고 행복했다." - '책머리에' 몇 토막

지난 2000년 10월,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실천문학사)을 펴냈던 작가 박완서(73)가 4년만에 새로운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현대문학)을 펴냈다. 작가의 첫사랑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은 <문학과 사회>에 발표한 단편 '그 남자네 집'을 주춧돌로 삼아 연작으로 이어 쓴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나'(작가)가 아파트에 살다가 땅 집으로 이사를 간 후배의 집에 갔다가 그 주변에 첫사랑의 남자가 살았던 기와집, '그 남자네 집'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5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작가의 20대를 휘감았던 아름다운 첫사랑을 50년이 지난 지금 차분히 더듬고 있는 것이다.

박완서는 책머리에서 "현대문학이 창간한 지 50주년을 맞게 된다는 소리를 듣고부터 그때에 맞춰 소설책을 한 권 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머리말)며,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힌다. 그리고 "강요된 바도, 계약 따위 절차를 밟은 바"도 없었지만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고부터는 스스로 그 생각에 얽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리궁상들이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 70쪽


한국전쟁이 마악 끝난 1950년대, '나'는 어머니와 함께 돈암동 안감천변에서 살아간다. '나'는 그 곳에서 '그 남자'를 만나 쓰레기더미로 변해버린 서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랑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 사실을 눈치 챈 '나'의 어머니는 '그 남자'가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말 그대로 "한 푼도 못 버는 백수"였고, '나'는 "다섯 식구의 밥줄"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가 미군부대에서 만난 전민호는 '그 남자'와는 달리 "웬만한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은행원이다. 결국 '나'는 민호와의 결혼을 결정하고 '그 남자'에게 청첩장을 내민다.

그때 '그 남자'는 격렬하게 흐느낀다. '나'는 "그의 어깨가 요동치는 걸 보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차라리 "그를 보듬어 내 품안에 무너져 내리게 하고" 싶다. "그때 그가 바란 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위안"이었고, '나'는 그를 보듬고 싶은 "지옥불 같은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를 안아주지도 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젊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 169쪽


결혼을 한 '나'는 남편이 '웬만한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은행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된다. 그리고 매달 남편이 주는 적은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기도 빠듯하다. 게다가 집안의 모든 일을 박수무당과 의논하는 시어머니와의 종교적인 갈등까지 겹쳐 '나'의 결혼생활은 더욱 피곤해진다.

그런 어느날, '나'는 시장에 갈 때마다 자주 들르는 올케의 포목점에서 '그 남자'의 누나를 만나게 된다. '나'는 '그 남자'의 누나로부터 '그 남자'의 첫사랑이 '나'였다는 이야기와 '그 남자'의 소식을 듣게 되고, 급기야 '그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만남의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마침내 '그 남자'는 '나'에게 하룻밤 밀월여행을 제안하는데….

박완서의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은 지난 50년 동안 작가의 속내 깊숙이 감추고 있었던 첫사랑에 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기억이다. 작가는 이루지 못한 그 슬픈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 시대 사람들의 고된 삶까지 따스하게 보듬는다. 마치 "기억 중에는 갚아야 할 것 같은 부채감을 주는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의 부채를 갚는 것처럼.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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