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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거목 박완서의 신작 <그 남자네 집>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은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로 작가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소설 속 화자를 작가 자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나 작가의 체험이 짙게 묻어났다는 사실 등은 실상 이 작품을 박완서가 ‘걸어온 삶의 길’ 한 조각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그 남자네 집>은 화자가 돈암동으로 이사 간 후배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과거의 기억을 아주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는 현재의 돈암동에 방문한 화자는 젊은 날 자신을 '구슬 같은 여인'으로 만들었던 첫사랑의 주인공이 있던 '그 남자네 집'을 기억해낸다.

작품은 이때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치되는 상황, 이념을 따르는 젊은이들의 목숨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냉전시대의 한복판에서 화자는 '연애'를 한다. 첫사랑과의 연애, 그 남자와의 연애는 화자로 하여금 전쟁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에서 시를 찾고 음악을 찾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그해 겨울은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이었다." <그 남자네 집 中>


하지만 화자에게 전시 상황마저 잊게 만드는 그 구슬 같은 시절은 환상으로 끝난다. 멀쩡한 상이군인이자 백수인 그 남자는 첫사랑의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 속 남편은 현실 감각이 투철한 은행원 민호라는 인물이다. 결국 화자는 첫사랑에게 청첩장을 보여주고 은행원의 부인이 되어 낯선 집안의 새댁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 남자네 집'과의 인연의 끈을 끊지 못한 채 말이다.

<그 남자네 집>은 첫사랑인 그 남자와의 추억이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는 아니다.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단편영화를 보는 것 같은 세밀한 묘사 덕분에 새댁으로서 문화 차이와 살림하는 것을 실감해나가는 화자의 모습, 전시 상황의 피폐함과 가족의 곤궁함을 어떻게든지 벗어나려고 시장과 길거리에서 발버둥치는 여성들의 삶을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림처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제왕처럼 제 입만 아는 남편과 영원토록 아들을 입맛으로 붙들어두려는 시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에 복잡한 비애를 느꼈다. 나의 비애는 패배감일 수도 있었고, 체념일 수도 있었다. 문득 시어머니가 길들여놓은 남편의 입맛은 그들 모자의 탯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나이에 아직도 탯줄을 못 끊은 남편이 경멸스러웠지만 내가 어찌 해볼 염두는 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아내이지 산파가 아니지 않는가." <그 남자네 집 中>


누군가의 표현처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는다는 나이를 훌쩍 넘은 작가는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펜을 놀리고 있다. 단순히 펜을 놀리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전성기적 모습을 연상케 할 만큼 어느 것 하나 허술함이 없다. 세상 이치를 깨닫듯이 소설쓰기도 도를 깨우친 것처럼 보일 정도다.

흔하디 흔한 개인사를 넘어 시대사를 보여주면서도 애틋한 첫사랑의 이야기까지 보여주는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 눈길 끄는 소설들이 범람하는 지금 구슬 같은 소설로서 독자들에게 소설 읽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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