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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아내를 출근시켜 주기 위해 차 운전을 하던 어느 날 아침, 나와 아내는 잠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번엔 열흘 늦게 허는데, 꽤 아프네요."

아내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지요. 그 정도도 눈치가 없다면 그건 남편 자격이 없는 것일 터이고….

"아니, 그럼… 당신이 아직 여성이란 말여?"

나는 짐짓 반색을 하며 물었지요.

"아니, 마누라는 지금 아파 죽겠다는데, 그것에는 아랑곳도 않고 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해요?"

"당신이 아무리 아파 죽는다구 헌들, 또 내가 아랑곳을 헌다구 헌들 지금 당장 무슨 수가 있겄남. 안 그려?"

"그래두 그렇지…."

"그런디, 마누라가 아프다구 허는 소리가 내게는 왜 그렇게 반갑게 들리는지 물르겄네. 왜 그럴라나?"

"참 반가울 것두 많네요."

그러면서도 아내 역시 뭔가 싫지 않은 기색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했습니다.

"이번엔 열흘이나 소식이 없어서 이제 그만 완전히 끝나려는가 보다 했더니…."

"그러니께 당신두 그게 반갑다는 얘기구먼?"

"나두 좀 반갑기는 허지먼, 그래본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고작 잠시 더 지연될 뿐인 걸…."

아내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 담담한 표정 속에 어떤 쓸쓸함 같은 것이 묻어 있는 것도 같더군요.

"그게 완전히 끝나는 일이 이젠 시간 문제라 허더라두, 난 그런 대로 기분이 좋구먼. 내 마누라가 아직 여자라는 사실이 왜 이렇게 기분 좋지?"

"아니, 그럼 그게 끝난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는 말이에요? 또 그때는 기분이 나쁠 거라는 얘기예요?"

"그건 아니여. 절대루 그건 아니지먼, 당신이 아직 여자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는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아. 고마워, 당신."

"쳇, 고마울 것도 많네요.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번 느끼고 확인한 것일 뿐인데, 겨우 그걸 가지고…."

"결국 그렇게 되나? 그렇다구 치지 뭐. 그래도 난 오늘은 즐거운 기분이여. 우리의 가을은 좀더 후에 천천히 느껴도 될 것 같구…."

그러며 나는 아내에게 씩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또 한번 아내의 얼굴에서도 세월 굽이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런 느낌을 좀더 저만치 밀쳐두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아내를 학교에다 내려다주고 돌아오는데, 노란 은행잎이 내 차의 앞 유리에도 떨어져 내리더군요. 그래도 나는 의식적으로 가을 느낌에 충실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꿈이 너무 야무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2>

가족과 함께 또 한번 덕산 온천으로 목욕을 갔습니다. 아빠의 175cm 키보다 무려 5cm나 더 큰 중2 아들녀석의 검은 사타구니를 다시 보았지만, 이제는 그게 우습지도 않더군요.

얼마 전에 목욕탕에서 어느 새 검게 털이 나버린 아들녀석의 그 곳을 처음 보았을 때는 어찌나 놀랍고 신기하고 우습던지….

"아니, 지난번에 목욕탕에 왔을 때는 털이 하나도 나지 않고 그냥 멀쩡혔는디, 원제 이렇게 되었다니?"

나의 이런 질문에 아들녀석은 의외로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도 몰라요.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정말 아들녀석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자꾸만 그쪽으로 눈이 갔고, 괜히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더군요. 조금은 당혹스러워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그 날 처음 본 아들녀석의 검은 사타구니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와 아내도 낄낄거리듯이 웃더군요.

또 한번 그 날의 우리 집의 풍경을 떠올리며 혼자 웃음을 짓고, 아들녀석이 겨우 걸음발을 타던 시절부터 목욕탕에 데리고 온 세월이 어제 같은데 벌써 여기까지 왔다니…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느끼기도 하며 목욕에 열중하는데, 옆에서 몸을 닦던 아들녀석이 내게 물었습니다.

"아빠, 면도 안 하세요?"

아들녀석의 의젓해진 존댓말에서도 묘하게 세월을 느끼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습니다.

"아빠는 어제 면도를 해서 오늘은 턱수염이 별로 읎어. 그래서 오늘은 면도기를 살 생각도 허지 않았다, 야."

일단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난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들녀석에게 물었지요.

"왜 오늘은 아빠 면도까지 신경을 쓰냐?"

"면도하는 법 좀 배우려구요."

이렇게 아들녀석은 냉큼 대답하더군요.

"그려? 아직 네 턱은 수염이 나오려면 먼 것 같은디…?"

"아뇨. 두 개가 나왔어요."

"뭐? 턱수염이 두 개 나왔다구? 어디 보자."

나는 아들녀석을 다가오게 한 다음 아들녀석의 쳐든 턱을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두 가닥의 수염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삐쭉이 나와 있더군요.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염이 이렇게도 나는구나. 이 수염 두 개를 처치하고 싶어서 그러냐?"

"면도하는 법도 일찌감치 배워 두려구요."

"그려. 아빠가 면도허는 법을 갈쳐 줄게. 그런디 면도기가 읎어서 워쩌지? 밖에 나가 옷장에서 돈을 꺼내 갖구 면도기를 사오는 건 너무 번거로울 테구, 누가 쓰고 버린 것을 주워서 쓸까?"

그리고 나는 주변의 쓰레기 바구니 안에서 손쉽게 일회용 면도기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누가 보는데도 챙피하지 않아요?"

"챙피허긴…. 아빠는 이런 일 많이 헸어. 몇 번을 더 쓸 수 있는 면도기를 사람들이 일회용이라구 딱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매번 남이 쓰고 버린 것을 주워서 쓰곤 헸거든."

"요즘은 왜 그렇게 안 하셔요?"

"누가 아빠의 그런 행동을 보고 간염이나 에이즈 감염을 조심해야 헌다구 겁을 주어서, 지금은 아빠도 꼭꼭 새것을 사서 쓰구 있지. 그 대신 버리지 않구 집에 가지구 가서 여러 번을 사용허니께, 너두 장차 그것을 본받어야 혀."

아들녀석에게 면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좋은 생활교육도 한가지 일깨워준 셈이었습니다. 나는 주워온 일회용 면도기를 뜨거운 물에 여러 번 씻을 다음 우선 내 턱에 비누칠을 하고 면도를 했습니다. 턱에 비누칠을 해야 면도날이 잘 미끄러진다는 설명을 덧붙였지요.

아들녀석은 아빠의 면도 시범을 유심히 보더군요. 그런데 아들녀석은 면도기를 받아들고서는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추고 하는데도 면도날을 정확히 턱에 붙이지를 못하더군요. 비누칠을 한 탓이기도 할 테지만 두 가닥의 수염이 나 있는 부위를 제대로 찾지도 못하는 것 같았고….

"잘못하면 면도날로 살을 벨 수도 있으니께, 오늘은 아빠가 헤줄게."

그러자 아들녀석은 순순히 면도기를 내게 넘겨주더군요. 나는 면도기를 받아들고 삐죽이 두 가닥의 수염이 나 있는 아들녀석의 턱에 살며시 면도날을 대었습니다.

내가 나이 마흔에 결혼하여 마흔 셋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갓난 녀석의 고추를 처음 볼 때 아내가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당신 좋겄수. 장차 목욕 동무할 녀석이 생겨서…."

그때가 어제 같은데…. 다시 한번 세월 빠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아직 내 아들녀석은 중2 소년기인 데다가 미소년의 용모였습니다.

아직 날창날창한 소년 기색인 아들녀석의 얼굴은 목욕 기운으로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뽀뽀를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더군요. 삐죽이 나 있는 두 가닥의 수염 때문에 턱을 쳐들고 있는 아들녀석도 우습고, 그 두 가닥의 수염을 처치해주기 위해 아들녀석의 턱에 면도날을 대고 있는 내 모습도 우스울 거라는 느낌이 문득 들더군요.

그리고 이런 장면 속에서도 내 중년의 세월은 고즈넉하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도 문득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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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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