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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에 세워진 병영 홍교. 장방형 화강석재 74개를 26열로 정교하게 무지개처럼 쌓아 올렸다.
ⓒ 오창석
전남 강진군 병영면은 '지방에 주둔하는 군영'을 일컫는 병영(兵營)이라는 일반 명사가 아주 지명으로 굳은 곳이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나라를 지켜낼 수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충무공의 말도 있지만 강진 병영이 호남의 군사적 본거지로 5백년 동안이나 이 나라를 지켜온 본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의 팔도에는 각도의 군사적 요충지에 요즘으로 치면 군사령부격인 '병영(兵營)'이 있었는데 조선 태종 때 도강현(道康縣)과 탐진현(耽津縣)을 병합한 강진현(康津縣)에 전라도의 군사령부이자 훈련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병영성 일대(1391년부터 행정구역상 병영면) 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월출산에서 발원한 탐진강의 지류인 금강천이 젖줄이 되어 작천, 병영 평야를 적시고 있다.

험준한 산 사이의 협곡만 차단하면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고, 군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기름진 들판과 넉넉한 수원(水源), 그리고 배후에 천혜의 산악요새인 수인산성(修仁山城)을 끼고 있는 이곳은 태종 17년 강진현의 시작과 함께 조선 왕조 500년 영욕의 역사를 함께 해 왔다.

▲ 국비 지원으로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2007년에 완공 예정인 병영 성곽
ⓒ 오창석
태종의 심복이었던 마천목 장군(병마절도사)에 의해 전라병영이 설치될 당시, 서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는 고려 말은 물론 조선조에 이르기까지도 국방과 민생을 위협하는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고려 고종에서 공양왕 시기 169년 동안 484회의 침입이 있었는데 고려 말 우왕 때만 해도 무려 378회를 기록할 정도로 고려 왕조의 몰락을 재촉한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조선은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해안과 인접한 강진에 전라병영을 설치하여 전라좌, 우수영과의 합동 작전으로 적을 격퇴하고자 했다. 배후의 수인산성은 병영성이 함락되었을 때 군민(軍民)이 산성으로 들어가 장기 항전을 계속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시기에 충무공의 수군이 서해안을 돌아 선조가 있는 평안도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있을 때 전라병영의 군사들은 왜군들의 수중에 들어간 지역으로 출병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지만 정말 충무공의 말대로 전라수병과 전라병영이 없었다면 조선의 국토는 그야말로 왜놈들에게 완전히 유린당하고 왕조가 무너지는 끔찍한 비극을 맞았을 것이다.

▲ 계곡을 가로질러 축조한 수인산성. 물이 흘러가도록 밑쪽에 2개의 구멍을 낸 독특한 양식이다.
ⓒ 오창석
임진·정유 양란의 시기에 임금은 강화도나 의주로 피난하고 왜적의 총칼 아래 짓밟힌 백성들이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병영의 군민(軍民), 충무공의 수군, 그리고 의병들은 최후의 일각까지 국토를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입은 이 지역 백성들의 인적·물적 부담과 원정으로 인한 고통은 더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설치 초기에 2만이었던 인구는 지금 3천명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쇠락하여 융성했던 병영의 옛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한말의 <병영지>에 따르면 병영성의 총연장은 1220m, 건물은 객사, 동헌, 서헌, 군사시설, 창고까지 합하여 총 96칸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한다. 지금은 병영초등학교 외곽에 남아 있는 성곽과 병마절도사나 군관들이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통행했다는 한골목, 병영면사무소에 남아 있는 병사와 관원들의 공적을 기린 25기의 비석 등이 옛 자취를 가늠케 할 뿐이다.

▲ 수인산성을 순시하는 군관들이 통행했을 '한골목'의 고즈넉한 풍경.
ⓒ 오창석
수인산성은 본래 삼국시대의 백제가 축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으로 고려 말에는 지금의 강진, 보성, 장흥, 영암 지역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들어 왔고 역시 태종 때 전라병영이 설치되면서 재수축된 천년의 역사를 가진 산성이다. 수인산의 능선을 따라 총연장 6km로 펼쳐진 산성은 한일합방 때 함평출신 의병장 심남일 장군의 활동무대이고 장흥 출신 이교민 장군이 전사한 곳이며 6·25 때는 빨치산의 유격 거점이기도 했다.

난리를 피해 들어와 살았던 백성들의 집터와 우물 터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산속에 웅크리고 앉아 차갑게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두고 온 농사일과 살아갈 앞날 걱정으로 한숨지었을 그들의 모습이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 어른거린다. 성벽을 이룬 육중한 돌들마다 그것을 옮기던 그들의 거친 숨결이 배어 있고 손자국이 지문처럼 남아 있는 것만 같다.

▲ 하멜 일행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판 것과 동일한 모양의 네델란드 나막신. 병영면이 하멜의 고향 네델란드 호르콤시에서 구입, 면사무소에서 전시하고 있다.
ⓒ 오창석
우리 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은 1653년 제주도에서 난파 당한 후 14년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이땅에서 체험한 생활 풍속, 지리, 정치, 군사, 교육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는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의 서기였으며 책의 내용은 보고서 형식을 띤, 14년 동안 받지 못한 임금에 대한 청구서였다.

하멜 일행은 7년 동안 강진 병영성에서 머물러 생활했는데 그 기간에 나막신 만들기, 구걸, 장사를 해서 땅뙈기도 마련하는 등 귀국을 포기하고 조선에서 정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영영 제 나라로 보내줄 것 같지 않던 조선 정부가 갑자기 귀국을 결정하자 일행 중 일부는 “이제 조금 살만해졌는데 내쫓는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들이 그늘에 앉아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는 은행나무며 억류 생활 터는 지금도 그 형태가 남아 있다.

강진은 남도답사 일번지답게 각종의 문화유적으로 가득하다. 천년고찰 백련사, 벽화로 유명한 무위사, 고려청자 도요지, 다산초당, 동학농민군 최후의 격전지, 그리고 가까운 곳 해남에는 영화감독 장선우가 언젠가 절 밑에서 그냥 바라보다 퍽퍽 울기만 하고 내려왔다는 ‘미황사’. 정서향(正西向)인 미황사는 서해낙조를 볼 수가 있는데 지는 해는 바다 보다 사람의 가슴을 붉게 물들인다.

▲ 병영을 다스리던 관원들의 공적을 기록한 25기의 비석.
ⓒ 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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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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