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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식용 액자에 넣은 전통 활과 화살
ⓒ 오창석
"세월은 쏜살같이 흐르고, 청춘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돌아올 줄 모른다."

활과 화살은 세상 일과 시간을 비유하는 데 흔히 쓰인다. 그 중에서도 '효시(嚆矢)'는 어떤 일이나 사물의 맨 처음을 뜻하기도 하면서 화살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살상용 화살촉 대신에 일종의 '나무피리'를 끼운 이것은 공중을 날아가며 긴 휘파람 소리를 낸다. '피요오~'하며 날아가는 소리를 '효(嚆)'라는 의성어로 표현한 셈인데, 이 공격 개시 신호에 따라 말을 탄 병사들은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 적진으로 내달렸다.

▲ 위에서부터 효시, 화약통을 매단 신기화전, 불화살(화전)
ⓒ 오창석
중국에서 우리 민족을 지칭한 '동이(東夷)'라는 말에서 '이(夷)' 자(字)를 풀이하면, '大'와 '弓'이 합쳐진 것으로 큰 활을 쓰는 사람이란 뜻이다.

중국의 수 양제(隨 煬帝)와 당 태종(唐 太宗)은 이 땅을 침범하려 들었다가 활 잘 쓰는 고구려인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돌아갔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렵도나, 백제, 신라, 고려에 대한 역사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지금이야 텔레비전에서 사극을 보거나, 박물관에 가야 겨우 전통 활을 구경할 수 있지만, 조선조 500여년 동안 궁술은 무과 시험에서 빠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과목이기도 했다.

▲ 전통 각궁
ⓒ 오창석
현대에 우리가 볼 수 있는 활(국궁)은 '각궁(角弓)'이라 하는데 고급 활에 속한다. 활을 만드는 시기는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가 적기이다. 그것은 활의 접착제로 쓰이는 민어부레풀이 기온이 높고 습도가 높은 계절에는 제대로의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각궁은 왕대, 산뽕나무, 물소 뿔을 얇게 켠 다음 민어부레풀로 서로 접착시킨다. 거기에다 실처럼 가는 소 힘줄을 7, 8일간 반복해서 붙인다.

이러기를 4개월 여를 지나야 활이 완성되는데,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건조한 장소에 보관해야 하고 계절별로 적정 온도를 유지해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온돌방이 각궁 보관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 오창석
이렇듯 제작과정에 품이 많이 들고 보관이 용이치 않은 각궁인지라 성능이 좋다고 하여 아무 때나, 누구나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삼국시대부터 각궁이 만들어지고 쓰였으나 조선시대까지도 지휘관 등 일부 사람들만이 각궁을 사용했을 뿐, 대부분의 병사들이 사용한 활은 산뽕나무 등을 재료로 해서 만든 목궁이었다고 한다.

화살 또한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기는 매 한가지인데 시누대를 주 재료로 하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광대싸리나무를 쓰기도 했다. 화살은 무게와 용도에 따라 많은 종류로 나뉜다.

무과의 시험에 사용되었던 나무로 만든 목전(木箭), 화살이 매우 작으며 촉의 끝이 길고 날카로워 갑옷도 관통한다고 하는 편전(片箭, 속칭 애기살), 세조 10년에 발행한 '팔방통보'라는 화폐를 전시에는 화살촉으로 쓴 유엽전 등 수십 여종이 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에 의하면 공조의 공장부에 장인들을 두어 활과 화살을 만들게 했다고 전한다. 그 장인들을 'OO장'이라 부르지 않고 궁인(弓人), 시인(矢人)이라 하여 보통의 장인들과 다르게 예우할 만큼 각별히 여겼다. 지금은 그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궁시장(弓矢匠)'이라 한다.

전남 광양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 김기(65) 선생이 전통 활의 맥을 잇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 광양에는 활 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정작 화살 만드는 사람이 없어서 외부에서 장인을 초빙해다가 겨우 수요를 맞췄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김 선생은 화살 만드는 장인의 눈에 들어 심부름을 하게 되었고, 이것 저것 얻어 먹는 재미에 학교도 빼먹으며 장인을 따라 다니기 시작한 것이 벌써 45년 전의 일이다.

▲ 김기 선생이 시위를 매지 않은 활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 오창석
"광양에 활 쏘는 어른들이 화살 대기가 힘드니까 오동도에서 대 비어다 놓고 겨우 어깨 너머로 배운 어린 놈한테 맨들어 보라고 안헌가? 거그 시누대를 해장죽(海藏竹)이라고 최고로 쳐주제. 혼자 하다 보니까 한 3년 돼서야 화살이 나오기 시작했는디 제 모냥은 안 나오잖어.

그래 욕심이 생기다 본께 마산에 가서 조명제 선생님한테 7년을 배왔어. 그러고 활 만드는 것도 배워야 되겄어서 예천에 가서 또 배왔제. 활 쏘는 것도 배우고 말이여. 근디 지금은 활 안 맨들어. 화살도 손질이 120번은 더 간디 활은 천 번도 더 가."

하루 10시간 이상을 쪼그려 앉아서 활을 만들고 살대를 다듬어온 김 선생은 86년 9월에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선정됐다. 그렇다고 제작 과정의 수고로움이 덜해진 것은 아니다.

"인자는 다 치우고 싶어. 87년 가을에 여그 왼손 엄지가 대 자르는 톱에 짤라져 부렀어. 내가 무형문화재만 아니었으먼 그냥 둬 불라고 했는디 책임 다할라고 떨어진 살점 주어다가 12번 수술했어. 살림 다 날렸제. 우리 아들이 그러대. '아부지 나 백만 원 벌이만 되믄 일 배우겄소' 허드랑께. 아들놈은 지금 대처에 나가 직장 댕겨."

▲ 시위에 화살을 걸고 잡아당길 때 손가락에 끼는 숫깍지.
ⓒ 오창석
노년의 장인은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사명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이 놈이 날 먹여 살린다네"하며 살점 조금 붙은 왼손 엄지를 들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왠지 쓸쓸하다. 마음 한 구석이 쾡하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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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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