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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8월 18일 '대북송금 의혹사건' 4차 공판을 받기 위해 서울지법에 출두하는 박지원 전 장관. 의안인 왼쪽 눈이 오른쪽과 다른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 연합뉴스 배재만
서울 출신으로 '태평양을 건넌' 재미언론인 안동일씨는 지난해 <프레시안>에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한 바 있다.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들'이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경우, 이른바 '역(逆)이민'을 일컫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 '역이민자' 가운데는 고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더러 있어 재미동포 사회에서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다. 김경재(민주당)·박원홍(한나라당)·유재건(열린우리당) 의원과 김혁규 전 경남지사·유종근 전 전북지사, 그리고 김한길·박지원 전 문광부장관 등이 그렇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씨는 나이 서른에 적수공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규모 있는 사업체를 일궈 뉴욕한인회장을 거쳐 미주한인총연합회 회장까지 오르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데 이어, 한국 정계에 진출해 남다른 성실함과 친화력으로 오랜 야당 대변인 생활을 거쳐 국회의원과 장관,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오르는 '코리언 드림'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에 이어 '코리안 드림'까지 실현한 선망과 질시의 대상

박지원씨는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목포 문태고(60년)와 서울 단국대 경영학과(69년)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뛰어나 공부를 잘했으나 중·고등학교 시절에 사람 구실을 못할 정도로 병약해서 이른바 명문학교에 입학하진 못했다고 한다.

그는 70년에 럭키 금성사(반도상사)에 입사한 뒤에 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장으로 도미했다. 그러다가 3년만인 75년에 가발 및 잡화를 수입 도매하는 회사인 '데일리 패션'을 설립했다. 박씨는 이렇게 해서 87년 귀국하기까지 15년 동안 뉴욕에서 살면서 사업체를 크게 일구었고 이를 토대로 80년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가 이룬 최연소 뉴욕 한인회장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동일씨는 당시 박씨의 사업체 '데일리 패션'에서 일했던 한 동포의 말을 빌려 '박지원 사장'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박 사장에게는 확고한 경영 철학과 모토가 있었습니다. 입사한 첫날부터 이를 강조하곤 했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첫째, 충성을 다하라. 둘째, 세일즈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는 것이다. 셋째, 내일 큰일을 위해 기도하지만 오늘의 작은 일에 열심히 매달려라' 이것들이었습니다." ('태평양을 두번 건넌 사람들' (1) 박지원, <프레시안>).

'내일 큰일을 위해 기도하지만 오늘의 작은 일에 열심히 매달려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DJ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다 갖춘 이 '입지전적인 인물'은 83년 가을 워싱턴 근교의 버지니아주의 한 아파트에서 망명중인 김대중씨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절대적 DJ맨'으로 변신하게 된다.

DJ "박지원의 장점은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그렇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씨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에 대한 평가가 신중하기로 유명한 DJ는 박씨의 자서전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의 첫머리에 '내가 본 박지원 대변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박씨를 이렇게 묘사했다.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박지원 대변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의 최고덕목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생김새와 언변과 문필력과 판단력이 모두 잘 어우러지면 어느 분야에서든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법인데, 박 대변인이 그런 정치인이다."

▲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박지원 전 문광부장관.
박씨는 실로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그리고 남다른 충성심으로 동교동계의 오랜 가신(家臣)들을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그가 맡은 자리만 해도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대통령 정책특보,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장에 이른다. 특히 박씨는 문광부장관 시절에 DJ의 특사로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역사적인 소임을 거뜬히 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의 선망과 질시 속에서 일부 언론에서 '부통령' 혹은 '대(代)통령'으로까지 묘사한 박씨는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직권남용 및 현대로부터 150억원 수뢰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12년·추징금 147억여원의 중형을 선고받고 항소심 결심공판을 남겨두고 있다. 대(代)통령에서 0.93평의 독방에서 수세식 화장실과 세면대를 쓸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범털'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DJ는 정치인의 최고덕목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거론하며 박씨의 생김새를 이목구비가 반듯한 호감을 주는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박씨에게는 숨기고 싶은 '핸디캡'이 하나 있다. 그리고 이 핸디캡은 그가 0.93평의 구치소에 갇히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4월 26일 오후 서울고법 형사1부(이주흥 부장판사) 심리로 고법 303호 법정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서 눈을 안대로 가리고 휠체어를 탄 채 나온 박지원 피고인은 "재판장께서 허락해주신다면 한 말씀 올리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에 20분간에 걸쳐 하나밖에 없는 눈을 지키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30년 전 녹내장으로 왼쪽 눈 실명해 의안 시술... 오른쪽 눈도 실명 위기

박씨는 30년 전 미국에서 왼쪽 눈에 녹내장이 와 실명을 해 수술을 받고 의안(義眼)을 했다. 박씨의 경우 유전성인데다가 한쪽 눈에 녹내장이 오면 다른 쪽 눈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매년 정기적으로 왼쪽 눈(의안)과 오른쪽 눈 전이 여부를 검진해왔다.

박씨는 87년 귀국해 정치권에 입문한 뒤에도 매년 미국에 가면 만사 제쳐두고 한번씩은 검진을 해왔다. 박씨가 미국행을 고집한 것은 시술을 미국에서 받은 탓도 있지만, 늘 사람들과 접촉하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핸디캡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그런 면도 있었다.

그런데 90대 초반 전국구 의원으로 민주당 대변인을 할 때부터 기자들과 자주 술자리를 가지면서 과로로 남은 한쪽 눈마저 안압(眼壓)이 높아졌다. 의사는 과로는 절대금물이라고 경고했지만 기자들과의 술자리는 계속 되었고, DJ의 심부름으로 미국 애틀란타로 가던 비행기 안에서 눈의 핏줄이 터져버려 미국에서 다시 치료를 받기까지 했다. 이 일을 계기로 DJ는 박씨의 한쪽 눈이 의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검진만큼은 미국 가서 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최장수 야당 대변인을 하면서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그리고 언론(인)과의 친화력을 토대로 닦은 그의 언론 인맥은 흔히 '위스키 앤 캐쉬'로 비유된다.

수감 7∼8개월간 4시간씩 운동하다가 1심에서 12년형 선고받고 건강 잃어

박씨는 비서실장을 하던 국민의 정부 마지막 2∼3년 동안 미국에 가지 못했다. 물론 의안과 녹내장 검진도 받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5년을 마치니 이번에는 대북송금 특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눈이라도 검진하고 오라고 권유했지만 자존심 강한 박씨는 치료목적으로 미국에 가더라도 괜한 도피 오해를 살까봐 가지 않았다.

박씨는 지난해 6월 대북송금 특별검사에 의해 구속되었다. 11개월째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다. 그는 처음 7∼8개월 동안 하루 4시간씩 운동을 하면서 독서와 성찰로 심신을 다스렸다. 그러나 무죄(150억 수뢰혐의)를 확신했던 그는 1심에서 12년형이라는 예상치 못한 중형을 선고받은 뒤로 평정심을 잃으면서 건강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곁에 있을 때부터 박씨의 눈을 걱정해온 DJ는 지난 1월 주치의 장승일 박사와 함께 권오웅 연세대 세브란스 안과 전문의를 보내 박씨의 눈을 검진케 했다. 검진결과 박씨의 하나 남은 오른쪽 눈에도 이미 녹내장이 전이되었다. 병명은 정상안압 녹내장. 안압이 높은 가운데 진행되는 일반적인 녹내장과 달리 안압이 정상치(10∼20mhg)인 가운데 녹내장이 진행되는 특이한 경우다.

그 이후 박씨는 1월에 1번, 2월에 2번 등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3번의 레이저 수술을 받았다. 그러다 3월 초 서울구치소로 돌아온 박씨는 4월 21일 오른쪽 눈의 안압이 갑자기 상승하는 등 녹내장 증상이 악화돼 세브란스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4월 22일 4번째 레이저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녹내장으로 더 이상 수감생활이 어렵다'는 구치소 의무과 의사와 전문의 소견서를 받아 재판부에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전문의 소견에 따르면, 이제 레이저 수술을 할 수 있는 1번의 스페이스(구멍)만 남은 상황이다. 그 뒤로는 집도(執刀) 수술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때는 시력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박씨는 구치소에서 매일 자신의 손으로 한두 번씩 자신의 상한 왼쪽 의안을 빼내 화장실물에 씻어 집어넣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남은 오른쪽 눈을 살리기 위해 '다이아막스' 등 7가지 안압 강하 및 녹내장 치료약과 심장병·디스크 치료제 등 18가지 약을 복용한다. 특히 다이아막스는 손발 저림과 온 몸의 뒤틀림, 그리고 고혈압 같은 부작용을 동반해 이 약을 복용하는 동안은 정신이 혼미해 하루 20시간 이상 잠만 잔다고 한다.

구치소에서 먼저 형집행정지를 해주면 좋겠다는 취지의 의견서 제출

그러니 간병인이 없이는 수감생활이 어려운 형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도관들이 그의 병수발을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서울구치소에는 그 외에도 권노갑씨,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 등 질병을 호소하는 '범털'들이 많다. 그럼에도 보다못해 구치소에서 박씨의 녹내장 치료를 위해 형집행정지를 해주면 좋겠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써준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씨는 4월 26일 항소심 재판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재판장에게 호소했다.

"죄 지은 것은 지은 대로 당당하게 책임지겠습니다. 죄가 있다면 죄값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눈만은 지키고 싶습니다. 하나 남은 눈을 잃지 않도록 입원 치료할 기회를 주십시오…. 절대 제가 당당하게 살지 눈을 핑계대지는 않습니다. 들것에 실려서라도 재판에 꼭 나오겠으니 재판장님 제 눈을 살려주십시오.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1심과 항소심까지 수차례 재판을 지켜보았지만 자존심 강한 그가 이토록 간절하게 호소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절박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장은 "다른 미결수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구속집행정지 여부를 신중히 판단하겠다"며 검찰 측에 박씨가 긴급한 의료조치가 필요한지 확인해 통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결심공판 기일을 5월 17일로 잡았다. 그 기간에 DJ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보건기구(WHO) 등의 초청으로 국고 보조를 받아 유럽을 방문하는 일정(5월10∼19일)이 잡혀 있다.

박지원 피고인은 재판이 끝나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가는 차 안에서 법정에서 참았던 답답한 심정을 참지 못하고 끝내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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