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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 마리
하늘을 간다

저쪽 산이
어서 오라고
부른다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아기 같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아가는구나!

- 이오덕 <새와 산>


위의 글은 이오덕 선생님 무덤 곁 시비에 새겨진 유시요, 아래 글은 그 시비 뒤편에 새겨진 선생님의 행적이시다.

"1925년 11월 14일 경북 청송군 현서면 구석들(덕계동)에서 나셔서 평생을 참꽃 살구꽃 복숭아꽃 피는 산골을 그리워하면서 농사꾼으로 살고 싶어하시다가 2003년 8월 25일 충북 충주시 무너미마을 고든박골에서 돌아가심"

▲ 지난 2003년 1월 필자와 월간 <전원생활> 연재기사 대담할 때
ⓒ 박도
오늘(2004년 1월 1일) 아침 나는 예사 때와 다름없이 043-857-4*** 전화번호를 눌렀다. 음악이 흘러나오다가 잠시 후 이오덕 선생님의 목소리를 너무나 닮은 아드님 이정우씨의 목소리가 반갑게 맞았다.

나는 선생님을 뵌 후(1997년) 돌아가실 때까지, 해가 바뀌거나 명절이면 빠짐없이 문안 인사로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문득문득 사람의 말이 그리울 때면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면 늘 선생님의 따뜻하고 겸손한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내 귀를 적셨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은 선생님에게 배웠다. 선생님은 늘 당신을 낮추셨다.

내 거친 글을 낱낱이 읽어주시고 틀린 글이나 외래어 한자어을 찾고서도 한 번도 고치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고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고만 말씀하셨다.

▲ 끝내 드리지 못한 저승가는 여비 봉투
ⓒ 박도
선생님께서 하늘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로 달려갔다. 곧장 선생님 빈소에 분향하지 못한 것은 선생님께서 유언으로 “장례는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르고, 장례 후 부고하며, 일체의 부의금이나 조화를 받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분향하였고, 끝내 선생님 저승 가시는 차비는 드리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박 선생, 곧 미국 간다지요. 내 손자 편에 다 듣고 있습니다. 잘 다녀온 뒤 자세한 얘기 들려 줘요.'


선생님의 나직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산새처럼 살다가 하늘로 날아간 이오덕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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