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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오덕 선생
ⓒ 박도
오늘 어둑새벽 신문을 펼치다가 일면 기사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운명 소식을 알았다. 출근 후, 오전 수업을 마치고 곧장 무너미마을로 달려갔다.

그런데 당신이 죽으면 반드시 가족장으로 치를 것, 부고는 장례 후에 알릴 것, 일체의 부의금과 조화도 받지 말 것을 말씀과 글로 남기셨다고, 각계에서 보내온 조화마저 빈소 밖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뒤로 놓였고, 조문객들이 빈소 참배도 못하고 밖에서 서성였다. 평소 선생의 성품을 아는 분은 마지막까지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가셨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안면이 있는 자부님이 먼 곳에서 달려온 조문객들을 빈소로 안내를 해서 분향은 했으나 선생의 마지막 저승 가는 차비는 끝내 드리지도 못한 채 나왔다.

'박 선생 먼 길 오느라고 고생했어요. 내일 수업 있을 텐데 요기나 하고 어서 가세요.' 이오덕 선생님이 다정히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내일(2003년 8월 27일)이 발인인 줄 알면서도 조용히 빈소를 물러나 대원휴게소에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선생은 한자말과 외래어, 외국어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아주 고집스레 우리말을 지키고 되살리는 일에 평생 동안 온몸을 바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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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이오덕 선생님 (1)

▲ 글방 앞에서
ⓒ 박도
그 모습은 마치 일제 시대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만주 벌판을 누볐던 독립투사처럼 거룩하기만 하다. 하긴 총칼을 들고 제국주의자와 맞서 싸운 것만이 독립운동의 전부는 아니다. 붓을 들고 우리말과 얼을 지키는 선비도 그에 못지않은 독립투사다.

1997년 여름, 선생을 뵙고자 과천 주공 아파트로 찾아갔다. 좁은 아파트 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찼다. 부엌 밥 짓는 곳과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통로를 뺀 곳은 모두 책이었다. 큰 밥상 위에도 신문과 책들이 수북이 쌓였다.

"박 선생, 이 신문들 좀 보세요. '뾰족탑'하면 될 텐데, 하나 같이 '첨탑(尖塔)'이라고 하고 있어요. 한글만 쓴다는 <한겨레신문>조차도 그렇게 쓰고 있어요."

그 무렵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을 헐어내는 보도 기사에 대한 선생의 불만이었다. 선생은 모든 인쇄물을 예사로 보지 않고 꼼꼼히 보셨다. 그런 후, 잘못된 표기나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 외국어로 적은 말은 일일이 찾아서, 글쓴이나 편집자에게 낱낱이 알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오덕 선생의 바탕 뜻은 다음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외국말과 외국 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민주고 통일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3년 뒤에 이루어질 것이 20년 뒤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민주와 통일의 바탕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한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 말이 들어온 역사도 한자말-일본말-서양말의 차례가 되어 있는데, 한자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말에 스며든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말은 한자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

▲ 이오덕 선생의 펀지
ⓒ 박도
내가 책을 펴내면서 선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자 아주 꼼꼼히 읽으신 후, 여러 부분을 교정해 주셨다.

식탁→밥상,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데도, 이따금씩→이따금, 교육이란 미명으로→교육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입장→처지, 주방→부엌, 야채→채소/남새, 획일적→판에 박은 듯이, 국민/민초→백성, 먹거리→먹을거리 ….

나는 선생이 일러주신 대로 글을 고쳐 놓고 보니 훨씬 깨끗하고 쉬웠다. 이밖에도 '~적(的)', '그녀', '및', '등', '에 있어서', '에의' 따위도 일본말의 찌꺼기라고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말로 고쳐 쓰거나 아예 못 쓰게 하셨다. 또, 서양 말법을 따른 '-었(았)었다'라는 과거 완료형 시제는 우리 말법에 없는 잘못으로 우리말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깨트린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얼굴을 붉혔다. 나는 해방 후 세대로 우리말과 글을 50여 년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왔는데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서 별 다른 생각 없이 한자말이나 외래어 일본말투, 서양 말법을 예사로 써 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에 대한 선생의 보탬 말씀을 듣고는 남녀평등에 대한 높은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왜 하필 여자를 가리킬 때만 '그녀'라고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남자를 가리킬 때면 '그남'이라고 해야 되지요. 남녀 없이 '그'로 쓰면 됩니다."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몸 바친 선생은 '우리말 우리 글 바로 쓰기' 못지않게 사람 교육에도 깊은 생각과 뚜렷한 철학을 가지셨다.

"사람이 사람답게 자라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삶이 있다. 그 첫째는 일하기인데, 사람은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고, 일을 해야 사람이 된다. 일을 해야 사람다운 태도를 가지게 되고, 일을 해야 사람다운 생각을 하게 되고, 사람다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일하는 가운데서 깨치고 찾아낸 것이 가장 올바르고 확실한 앎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도 일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사람의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즐겁게 하는 것 말고는 없다.

일이 즐겁고 그 일이 공부가 되려면, 그 일이 자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다.

옛날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보다 더 큰 스승은 없었다. 사람이 자연을 배우고 자연을 따라 살면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된다.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아름답고 참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자연을 배반하고 거역하면 사람은 병들고 스스로 망한다. 자연이 없는 교육은 죽음의 교육이고, 자연을 떠난 삶은 그 자체가 죽음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가난의 체험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가난해야 물건을 귀하게 쓰고, 가난해야 사람다운 정을 가지게 되고, 그 정을 주고받게 된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넉넉해서 흥청망청 쓰기만 하면 자기밖에 모르고, 게을러지고, 창조력이고 슬기고 생겨날 수가 없다. 무엇이든지 풍족해서 편리하게 살면 사람의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연이 다 죽어 버린다. 가난은 어렸을 때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이 가난은 책으로 배울 수 없다. 가난하게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를 아무리 책을 통해 읽어도 자기 스스로 굶어 보지 않고는 굶주린 사람의 마음을 몸으로 알 수는 없다. 텔레비전으로 어떤 사람들의 가난을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가난을 구경한 것밖에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육에는 일과 자연과 가난이 사라졌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그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참된 사람 교육은 될 수 없는데, 이 세 가지가 죄다 없으니 무슨 교육이 되겠는가? 지금 우리 교육은 이 세 가지를 싹 쓸어 없앤 자리에 딱딱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고 그 속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는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아귀다툼을 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무슨 사람다운 교육이 되겠는가?"

▲ 늘그막 선생님의 언덕이었던 장남 정우 씨와 함께 글방 앞에서
ⓒ 박도
또, 선생은 생명의 존엄성과 자연 환경에도 큰사랑을 지녔다. 과천에서 아드님이 사는 충주시 신니면 수월리(무너미) 마을로 거처를 옮긴 후 대여섯 차례 찾아뵈었다.

무너미 마을은 장호원에서 충주로 가는 길 중간쯤 오른쪽 산골 마을이다. 야트막한 고갯마루에는 아드님 내외가 농사를 지으면서 밥집, 우리 농산물을 파는 가게도 열고 있었다.

선생은 거기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 중턱 개울가에다 아담한 글방으로 꾸며 놓았다. 이 글방은 아드님이 아버지를 위해 손수 지었다는데 그 방안도 온통 책으로 가득 찼다. 책꽂이에는 우리말 우리 글 바로쓰기에 대한 자료와 사오십 년 전 코흘리개 제자들의 글모음을 여태 보배처럼 간직해 두었다.

처음 무너미 마을로 찾아뵈었을 때는 글방 창문 앞 오이덩굴 얘기를 하셨다. 그때 들려준 말씀이 <우리 말 우리 얼> 제16호에 실린 바 선생이 손수 그린 그림은 생략하고 글만 옮겨 본다.

자연, 이 놀라운 생명
- 우리가 무심히 먹고 있는 조그만 열매 하나에도…-

창문 앞 오이덩굴이 자꾸 뻗어 올라가는데, 나중에는 창틀 아주 위쪽까지 올라갔고, 거기 오이가 달렸다. 너무 높아 따지 못하고 두었더니 오이는 자꾸 굵어졌다. 그래도 오이는 감 따는 장대로 어찌어찌 해서 겨우 오이를 땄는데, 크게 놀랐다. 무거운 그 오이를 받쳐준 것이 받침대 나무의 옹이였던 것이다. 그 옹이가 있는 곳까지 가서 오이를 받쳐 놓았으니, 오이덩굴은 눈도 귀도 코도 입도 손도 발도 다 있고, 마음도 다 있는 것이 틀림없다.


다음번에 찾아뵈었을 때는 몹시 앓은 뒤라서 아무나 귀찮을 만도 한데, 멀리서 찾아온 손을 무척이나 반겨 맞았다.

"요즘은 시골사람들도 어진 마음씨를 잃어가고 있어요. 아무 산에다 덫을 놓아 마구잡이로 들짐승을 잡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온 들에다 농약이나 제초제를 마구 뿌려서 생명체의 씨를 말려요."

마침 밥상 위에 있는 쭉정이 강냉이 송이를 보여 주셨다.

▲ 선생님이 손수 그린 강냉이
ⓒ 박도
"이 강냉이 송이가 무슨 말을 할까요? 낮에 감자 껍질, 사과 껍질 같은 걸 거름으로 버리러 뜰 앞에 나갔다가, 매화나무 옆에 지난해 다 거둔 강냉이 그루터기에 보잘 것 없이 조그만 송이 하나 있기에 주워서 까 보았더니 글쎄 죄다 쭉정이에 딱 한 알 한 개만 굵직하게 꼭 바윗덩어리, 아니, 큰 금덩어리같이 붙어 있는 것 아닙니까? 쭉정이를 대강 세어보니 115개였습니다. 죽은 알 115개가 한 개를 살려서 이렇게 엄청나게 굵은 금덩어리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모진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고, 그렇게 굶주리던 온갖 날짐승도 차마 이 강냉이 한 알만은 먹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 사람이 조그만 이 강냉이 송이의 백 분의 일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이 강냉이 송이를 모셔 놓고, 쭉정이 수대로 백 열 다섯 번 절을 하고 나서, 그가 하는 말을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말 우리 얼> 제28호

나는 이따금 사람의 말이 그리울 때면 수화기를 들고 선생의 말씀을 들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럽고 맑은 말씀이 들려왔다.

지난 설날 아침에도 전화로 세배를 올리자 훈훈하고 겸손한 사랑이 넘친 말씀이 마치 돌아가신 할아버지 말씀처럼 내 귀에 닿았다.

요즘 우리나라는 날이 갈수록 외국의 문화가 밀물처럼 덮쳐와 우리 문화가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철없는 백성들은 자식에게 제 나랏말보다 외국말을 더 먼저 가르치겠다고 부부 별거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사대사상에 빠진 학자나 관리들이 국제화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영어의 공용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세태에 우리는 우리말의 큰 지킴이요, 어린이 교육에 큰 버팀목을 잃었다.

외딴 산골에 묻혀 사셨던 진짜 애국자 이오덕 선생님! 부디 편안한 세상에서 명복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이승에서 못다 누린 금실지락을 저승에서는 꼭 누리십시오. 선생님이 남기신 많은 글과 말씀은 두고두고 뒷사람들이 배우고 깨칠 것입니다.

2003년 8월 26일 박도 두 번 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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