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 은평공원 내 세워진 '이돈직 휘호비(왼쪽)와 생애비(오른쪽)'. 해당 단체는 당초 애국지사 김용원 선생의 휘호비와 생애비를 세운다며 국고를 지원받아 뒷면에 새기고 앞면에는 이돈직 관련 비를 세웠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 위 사진에 나온 휘호비와 생애비의 뒷면. 뒤를 돌아 봐야만 김용원 선생의 휘호와 생애를 볼 수 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어느 날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당신 조상의 비문이 고쳐졌다면? 그리고 그 조상이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였고, 고쳐진 비문 속에 엉뚱한 인물이 마치 조상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끼워 넣어져 있다면?

대전지역의 대표적 항일운동가의 비문에 전직 국회의원을 지낸 계룡건설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의 '확인되지 않은 독립운동 행적'이 무리하게 끼워넣어진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언젠가 독립운동가 중에도 가짜가 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오마이뉴스>는 이 어처구니없는 독립운동가 비문변조사건을 한 달 가까이 현장취재를 통해 심층추적했다.

감쪽같이 뒤바뀐 공적비의 문구

지난 2000년 11월 22일경 김옥경(67.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씨와 박준희(여. 57)씨 부부는 아침 일찍 나들이 채비에 바빴다. 김씨의 조부이자 애국지사인 김용원 선생의 유적비 건립현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김용원 선생은 일제치하 상해와 한국을 드나들며 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43세를 일기로 타계한 대전지역의 대표적 독립유공자다.

현장에는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규희(66. 대전 대덕구 송촌동) 회장이 동행했다. 이 회장은 김용원 선생의 공적을 기릴 조형물(흉상)을 세운다며 김씨 가족으로부터 200만원을 받아가는 등 유적비 건립 사업을 총괄한 인물이다.

애국지사 강산 김용원 선생은 누구
대전지역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

김용원 선생(사진. 1892-1934. 호 강산剛山)은 대전 서구 원정동에서 태어나 휘문의숙을 마치고 4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몸바쳤다.

보은 공주에서 독립자금을 모으다가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경무국원이 됐다. 귀국 후에는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해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탈출시키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이후 상해와 한국을 드나들며 끊임없이 항일운동을 벌이다 1924년 군자금 모금을 위한 독립 공채를 가지고 귀국하다 체포돼 2년형을 받았다. 그 후 영주 부석사를 거점으로 활동중 충남 논산에서 일본경찰을 죽이고 그 이듬해 체포돼 복역 중 1934년 43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그런데 유적비가 서있던 은평공원(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에 도착한 김씨 부부는 고개를 갸우뚱해야만 했다. 현장에 김용원 선생의 흉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비문 정면에 새겨진 생애비(높이 1.4m 폭 1.8m)와 휘호비(높이 4.3m 폭 1.4m)에는 김씨의 조부가 아닌 '이돈직'이라는 알 수 없는 사람의 휘호와 공적이 새겨져 있었다. 정작 김씨 조부의 생애와 휘호는 각각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이와 관련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 회장은 "이돈직 선생도 훌륭한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에 성금을 낸 회원들의 뜻에 따라 두 분을 함께 새기기로 했다"며 "관련 선양사업에 비용이 많이 들어 흉상은 세우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김씨 부부는 적잖은 비용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 데다 앞면이든 뒷면이든 같은 독립운동가라면 함께 새겨진들 어떠랴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번에는 조부의 행적을 설명하는 생애비문이 당초 이 회장과 합의한 문구가 아니었다. 게다가 김씨 부부가 들어 보지도 못한 '이돈직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씨 부부의 조부는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가지고 귀국하다 체포(1924년)됐음에도, 안내문에는 일본왕 암살 미수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하지도 않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사실관계마저 다르게 기재돼 있었다.

김씨 부부는 이 회장에게 "어떻게 한마디 상의 없이 조부의 행적에 허무맹랑한 얘기를 새겨 넣었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이 회장으로부터 "조부이신 김용원 선생의 묘지가 있는 서구 원정동 공적비에도 들어있는 내용"이라는 뜻밖의 답변이 나왔다.

▲ 김용원 선생의 묘소 앞 공적비. 이 비문은 원판이 통째로 바뀌었고 이돈직에 관한 문구가 새로 추가됐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며칠 후 김씨 부부는 조부의 묘소(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로 내달렸다. 현장에 도착한 김씨 부부는 공적비를 들여다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적비 비문이 누군가에 의해 통째로 뒤바뀌어 있었다. 원래 있던 대전시장이 세운(1990년 12월 1일) 원판 비문을 떼어내고 전혀 다른 내용의 비문을 새겨 붙여 놓은 것.

새 비문에도 '이돈직'이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김씨의 조부가 '후곡 의병 모집장 이돈직 선생 문하에서 10년을 수학하고 그 분의 주선으로 휘문의숙을 졸업'한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또한 김용원 선생이 대전에서 3.1만세 운동을 했고, 그것도 이돈직의 독려로 동참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와 관련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 회장은 "지난 1997년경 비문 받침대를 높이면서 나와 김씨(김옥경)의 남동생(김용경. 2000년 사망)의 합의로 교체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 부부는 이돈직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광복회대전충남연합지부로 향했다. 확인결과 이돈직이라는 인물은 의병활동 및 만세시위 운동과 관련해 공훈록은 물론 의병참여자 명단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ADTOP@
독립운동가 김용원 선생의 비문에 끼어든 이돈직은 누구일까

▲ 이돈직의 효평동 공적비. 97년에 세워진 이 비석에는 "대덕구 비래동산에 지금도 그 유적비가 남아 있어"라고 쓰여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그런데 김씨 부부는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 관계자로부터 또 다른 얘기를 전해 들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이덕산 회장(지난 해 사망) 명의로 지난 1997년 3월에 대전광역시 동구 효평동에 세운 이돈직의 공덕비에 공적 내용이 상세히 새겨져 있다는 것. 확인 결과 실제로 효평동 '이돈직 공덕비'에는 의병활동과 만세운동의 공적이 빼곡히 기재돼 있었다.

효평동 공덕비에는 또한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대덕구 비래동산에 지금도 그 유적비가 남아 있어 옛 시절을 말해주고 있다"는 글귀였다.

다시 김씨 부부는 대덕구 비래동산으로 향했다. 이돈직의 옛 시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어 물어 대덕구 무궁화동산(비래동산)에 세워진 '기미 3·1독립만세기념비건립기'와 표지석을 찾아냈다.

김씨 부부는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1994년 3월 1일 새겨진 이 비문에 "이 지역에 만세운동을 지휘주도한 선열로는 의병인 창의군 일대 중군장 이돈직 선생이었다. … 김용원, 김태원 선생… 등이 만세운동 주도자이시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표지석 아래에는 "대전애국지사숭모회 고문 이인구, 회장 이규희"라고 새겨져 있었다. 만세운동은 한 적도 없는 김용원 선생이 이미 1994년 새겨진 표지석에 이돈직의 행적과 함께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인결과 이돈직은 현 계룡건설 명예회장인 이인구 전 국회의원(전 애국지사숭모회 고문)의 조부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규희 회장은 이 전 의원과 인척은 아니지만 선거 때마다 이 전 의원의 선거운동을 돕는 등 최근 몇 년 전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김씨 부부는 "김용원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에 무명의 '이돈직 끼워넣기'가 이미 1994년에 시작돼 1997년 효평동 공적비·원정동 공적비를 거쳐 2000년 은평공원 공적비로 10여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1994년 2월 28일자 지역일간지 <중도일보>에는 사회면 머리 기사로 「"항일 투쟁 비밀로" 유언」이라는 제목아래 '독립운동가 이돈직 선생'의 일대기가 실려 있었다. 이 기사는 "대전일원에서 치열한 의병활동을 해온 항일지사 이돈직 선생의 공적이 구전되어오다 최근에야 밝혀졌다"며 "광복운동을 벌인 것은 나라사랑과 후손을 위한 행위였던만큼 자신의 행적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해달라는 유언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기사의 출처 또한 향리주민과 함께 김용원 선생의 비문을 다르게 새겨넣은 의혹을 받고 있는 대전애국지사숭모회였다. 기사 사진 속에도 이 단체 대표 이규희 회장이 등장하고 있었다.

두가지 의문 : 왜 비문을 바꿨나, 이돈직은 정말 독립운동가인가

문제가 되고 있는 비문 정리

▲ 94년 애국지사숭모회가 대덕구 비래동산에 세운 3·1독립만세기념비건립기와 표지석.
ⓒ오마이뉴스 심규상

1. 은평공원 휘호비·생애비
: 지난 2000년 11월 건립. 앞면에는 이돈직의 생애와 휘호가, 뒷면에는 김용원 선생의 생애와 휘호가 새겨져 있다. 김용원 선생의 후손이 이 비석에서 이돈직이라는 이름을 처음 보면서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 기사의 첫번째와 두번째 사진)

2. 원정동 김용원 선생 공적비
: 김용원 선생의 묘비 앞에 세워진 비석. 90년 대전시장이 새겨넣은 원판비문을 97년 떼어내고 다시 새겨넣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돈직의 이름이 등장한다. (세번째 사진)

3. 효평동 이돈직 공적비
: 97년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이덕산 회장 세운 비석. (네번째 사진)

4. 대덕구 비래동산(무궁화동산) 비문
: 94년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세운 비석. 이 비석에는 이돈직이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김용원 선생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제일 처음 나온다. 하지만 김용원 선생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적이 없다. (이 박스기사 위의 사진)
각종 비석과 신문 기사 등을 놓고볼때 무엇보다 두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규희 회장은 왜 김용원 선생(김씨 조부)의 행적에 수정을 가했을까. 둘째, 지역 유지이자 전 국회의원인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조부인 이돈직씨는 정말 독립운동가인가.

우선 첫번째 의문에 대해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자. 이인구 명예회장은 "조부(이돈직)의 행적은 잘 알지 못했는데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 회장(이규희)이 곳곳을 돌며 관련 증언을 채록해 밝혀낸 것"이라며 "대체로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 말씀과도 정황이 일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조부와 김용원 선생과의 관계 또한 조사를 한 이 회장이 잘 알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어 "은평공원과 대덕구(비래공원) 비문 작성 및 건립은 이 회장이 일체 상의 없이 혼자 한 일이고, 효평동 공적비는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이덕산 회장이 한 일이며, 원정동 공적비가 바뀐 일은 알지도 못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규희 회장은 "이돈직 선생과 김용원 선생과의 관계는 내가 오랜 조사와 증언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라며 "하지만 증언자들이 모두 사망한 상태"라고 말했다. 또한 이 회장은 은평공원에 세워진 김용원 선생의 생애비문과 관련해서는 "모두 당시 김옥경씨의 남동생(김용경. 99년 사망)과 합의해 이뤄진 일"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인구 명예회장과는 지난 선거를 기점으로 사실상 결별한 상태로 생애비나 휘호비 건립과 관련 상의하거나 일체 지원받은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김옥경씨는 "원정동 조부 공적비문 교체(97년)와 관련해 남동생(김용경. 2000년 사망)으로부터 어떤 얘기도 들은 바 없으며 은평공원 비문은 남동생이 아닌 나와 이 회장이 직접 상의하고 합의해 온 일"이라며 은평공원 비문 문구 협의 과정에서 이 회장이 남긴 메모를 증거로 제시했다.

김씨는 "모든 독립운동에 관한 문헌자료를 다 뒤져보아도 이돈직에 대한 이름은 물론 조부(김용원)와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며 "후손들이 조직적 의도적으로 가계를 미화하기 위해 조부의 이름을 판 것"이라고 단언했다.

독립운동사와 김용원 선생의 항일운동을 연구해온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이돈직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며 "아직까지 김용원 선생과 이돈직씨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어떠한 자료도 나오지 않았고 확인된 바 없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라는 자료 불충분"

두번째 의문, 과연 이돈직이 실제 독립운동가인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독립운동을 했을 개연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 회장은 "이돈직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은 학자들의 고증을 거친 것"이라고 말했다. '학자들의 고증'이란 지난 1999년 1월 22일 후손들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신청하면서 전 충남대 모 총장을 포함한 역사·철학과 교수 등 5명으로부터 추천서명을 받은 사실을 지칭한다.

당시 이돈직의 후손들은 활동 거증 사유로 '이강년 의병장 휘하에서 초병장 활동(1896년), 경부선철도용지 보상운동 주도(1903년), 을사조약반대 유림궐기운동 참여(1905년), 국책보상운동 문의면 책임자(1907), 대전 인동시장 3.1만세운동 주도(1919년)' 등을 명시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지난 2000년 "거증자료는 신청인의 주장과 학자들의 추천, <중도일보> 등 일부 신문에 게재된 내용이 전부여서 불충분하다"며 심사를 보류했다.

학자들은 어떤 근거로 이돈직의 행적을 고증, 추천하고 나선 것일까. 이에 대해 모 전 총장은 지난 8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돈직씨에 대해서는 언뜻 얘기는 들었지만 언급할 만큼 잘 알지 모른다"며 "잘 기억나진 않지만 유공자로 추천 서명했다면 내용을 연구검토하고 한 것이 아닌 휼륭한 분이라고 하니까 믿고서 한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나머지 추천에 서명한 3명의 교수들도 "다른 교수가 관련 서류를 가지고 와서 추천해 달라고 해 믿고 한 것이지, 이돈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머지 1명의 교수는 지난 2001년 사망했다.

이에 대해 계룡건설 이 명예회장은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었지만 조부의 독립유공자 신청 과정에는 간여한 바 없다"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어 "당시 보훈처 차장으로부터 관련 재판기록이나 신문 자료 등 거증자료가 불충분해 보류됐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며 "조부께서는 항일운동 도중 부상은 당했지만 붙잡힌 적이 없으니 당연히 처벌이나 재판기록이 없고, 독립 운동하는 사람이 독립운동 한다고 신문에 내고 다녔을리도 없지 않았겠냐"고 반문했다.

'이돈직 비문' 내용 각기 달라

이돈직씨의 객관적 항일행적도 오리무중 이지만, 후손들과 지인들이 세운 공적비 내용도 서로 다르다.

우선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대덕구 기념비(비래동산비)에는 이돈직씨의 의병활동당시 직위를 '창의군 일대 중군장'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97년 효평리에 세워진 '이돈직 공적비'에는 문의지역단위총책인 소병장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히려 효평리 공적비가 더 장문이지만 '창의군 일대 중군장'이라는 문구는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뒤바꿔 놓은 원정동 '김용원 선생 공적비'에는 '의병 모집장'으로 돼 있다.

사망 일자와 이유도 각기 다르다. 94년 대덕구 기념비에는 사망 일자를 2월 4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97년 효평리 '이돈직 공적비에는 2월 5일로 돼 있다. 사망이유도 대덕구 기념비에는 "병환으로 서거하셨다"고 적고 있으나, 2000년 은평 공원내 세운 이돈직 생애비에는 "만세를 선창 시위하시다 왜경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으신 후 향리에서 가료 중 순국"한 것으로 돼 있다. '왜경의 총탄에 맞아'가 새롭게 등장한 것.

또 뒤바뀐 원정동 '김용원 선생 공적비'에는 김용원 선생이 "이돈직 선생 문하에서 10년을 수학 1915년 그 분의 주선으로 휘문의숙을 졸업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김용원 선생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처 의숙의 주선으로 휘문 의숙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이돈직의 모든 공적비에는 김용원·김태원 선생 등과 함께 대전인근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돼 있지만, 김용원 선생은 같은 시기 김태원 선생과 함께 상해로 망명해 활동한 것으로 실증되고 있다.

검찰로 넘어간 사건... 3년간 건재한 '이돈직-김용원 생애비'

"할아버지를 두번 죽이는 일"
김용원 선생의 후손 김옥경씨.
ⓒ 오마이뉴스 심규상
김씨 부부는 은평공원 비문건립(2000년 11월)건과 관련해 수차례 대전애국지사숭모회 이 회장을 만나 비문 제작과정과 내용의 잘못을 시인받고 시정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이 회장이 차일피일 시간을 끌자 지난 5월 12일 이씨를 대전동부경찰서에 200만원 편취와 조부 비문 변조로 인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지난 7월 "범죄혐의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리했다.

김씨 부부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 회장과 단 한차례도 대질신문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이 회장의 진술만을 근거로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검찰에 재수사를 요구하는 항고장을 제출한 상태다. 대전 서구 은평공원에는 2000년 11월에 세워진 휘호비와 생애비가 아직도 그대로 서 있다.

김옥경씨는 "조부께서 일제의 손에 고문 당하고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를 팔아 이득을 보려는 후손들에 의해 또 한번 죽임을 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중 지원, 불법 조형... 시청-구청은 뭐했나
만세현장 유적비는 아예 안세워

은평공원(서구 월평동)에 세워진 김용원 선생 생애비 건립사업의 경우 사업비마저 행정기관으로부터 이중 지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대전시청이 지원한 휘호비의 경우에는 건립절차마저 거치지 않은 불법 조형물인 것으로 확인됐다.

대전시는 2000년 대전애국지사숭모회의 요청에 따라 '김용원 선생 휘호비 및 생애비 건립비'(900만원)와 '3·1운동 만세현장 유적비 건립비'(2곳 500만원)로 450만원의 자부담을 조건으로 950만원을 지원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서구청이 '전 국토 무궁화심기사업'의 일환으로 사업종료 일주일을 앞두고 생애비 지원사업에 310만원을 또 지원했다.

그러나 대전시에 제출된 사업 결과보고서는 '애국지사 김용원 선생과 독립운동가 이돈직 선생 휘호비 및 생애비 건립'으로 변경 보고됐고 3·1운동 유적비 건립비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전시는 이같은 결과보고서를 그대로 인정했다.

대전시 감사관실은 지난 5월 김씨 부부의 문제제기에 따라 감사를 벌여 "국고보조금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비문 내용에 대한 확인과 정산업무를 소홀히 한 점이 인정된다"며 담당 공무원을 훈계 조치하고 관할 부서에 시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관할 부서인 대전시 자치행정과는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관할 구청인 서구청도 '김용원 선생 생애비 건립비'로 예산을 지원했으나 '이돈직 생애비'가 함께 세워진 사실은 문제삼지 않았다. 또 김용원 선생의 비문 내용조차 당초 새기기로 한 내용과 실제 결과물이 다르게 나타났지만 이 또한 확인하지 않았다. 게다가 휘호비의 경우 아무런 행정절차를 밟지 않고 무단으로 불법건립 됐으나, 자금을 지원한 대전시도 관할 서구청도 이를 묵인해 왔다.

서구청 관계자는 문제가 제기되자 "경위를 확인해 시정조치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이 사업을 집행한 서구청 해당 관계자는 "오래 전이라 어떤 경로로 휘호비와 생애비가 건립 됐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전지역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국고를 지원받아 엉뚱한 사람의 생애비를 건립하고 만세현장 건립비는 아예 세우지 않은 만큼 고소 및 보조금 환수 조치와 비문 수정 등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