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화순 운주사에 가면 천불천탑을 볼 수 있을까?
ⓒ 권기봉
비 내리는 어느 날 오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찾았다. 화순 운주사(雲住寺). 미련하게도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듯한 운주사를, 이번 여행 이전에는 있는 지도 몰랐고 또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만이 우리네 석탑의 전부인 줄 알았고, 석굴암의 본존불과 산천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마애불들만이 석불의 전부인 양 생각했으니, 운주사의 그 신기한 석탑과 석불들을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L선배와 그로 인해 읽게 된 황석영의 <장길산>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 담고 광주행 버스에 오른 것은 쓸쓸한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차창으로 스치는 빗방울과 남도의 넓고 푸른 들판. 그리고 찰나의 졸음조차 용서 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광주에서 차를 갈아타고 화순 운주사 앞에 닿았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오후 어스름. 남도 별미라는 추어탕도 먹고 잠도 잘 겸 운주사 초입에 있는 식당으로 긴 자동차 여행에 지친 몸을 꾸역꾸역 들이밀었다. 창 밖으로 들리는 세찬 비 소리와 방 안에 켜둔 모기향의 조화. 오랜만의 여유에 복에 겨운 밤.

비 안개 자욱한 운주사로 들어서다

▲ 운주사의 경우 대개 암벽 아래에는 석불이, 암벽 위에는 석탑이 있다.
ⓒ 이선주
요즘 운주사는 ‘1300원’이라는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예산 수덕사나 경주 불국사처럼 ‘형체’가 남아 있는 사찰이라면 모를까 폐허에 몸을 맡기러 온 이들에게까지 입장료를 받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싶다. 물론 운주사를 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겠거니 하고 편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조계총림 송광사의 말사로 재정 형편이 나쁘지 않을 텐데도 자체적인 요금 징수라니, 정년 피안의 세계로 떠나기 위해서도 뱃삯을 지불해야 하는 것인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나 보다 생각하지만 어딘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입장료에 분한 나머지 어서 1300원어치 눈요기나 하자고 재촉하지는 말 일이다. 잠시 뒤로 돌아서서 주차장과 산 비탈을 유심히 살펴보자. 물론 특별히 보이는 게 있을 리 없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 자리가 원래 운주사터였다는 것을 알면 느낌이 새롭지 않을까? 운주사는 고려 초기 크게 번창했다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이야 그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고 그저 머리 속으로나마 화려했던 시절을 가늠해 볼 따름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안으로 옮기자. 어제 오늘 내리 비가 내려서인지 넓지 않은 계곡이지만 물살이 거세다. 비안개 자욱한 운주사와 차가운 비, 그리고 계곡의 세찬 물 소리. 그 옛날 더운 여름의 운주사도 이런 분위기였을까.

천불과 천탑이 있었다는데…

운주사에는 1000개의 석불과 역시 1000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흔히들 ‘천불천탑 운주사’라고 부르니 말이다. 그러나 이도 흘러간 옛 이야기일 뿐 지금은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석탑과 석불만이 남아, 무슨 청승인지 굳이 비 오는 날 이곳을 찾은 여행자를 맞아줄 뿐이다.

▲ V자와 X자, 꽃잎 문양 등 다른 석탑에서는 보기 드문 무늬들을, 운주사에 가면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밀교의 영향이라 보는 이들도 있다.
ⓒ 권기봉
일단 운주사 매표소를 지나면 9층 석탑을 비롯해 여러 석탑들이 마치 요즘 교회의 뾰족한 십자가 첨탑이라도 되는 듯 하늘 높이 솟은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독특한 모습. 즉 몸돌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참 특이해, X자나 V자, 마름모 무늬 등이 네 잎의 꽃 문양과 함께 보인다. 또 전탑(塼塔; 벽돌로 쌓은 탑)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탑의 지붕돌이 마치 전탑처럼 아래 위 모두 층급이 있는 석탑들도 여럿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아니 이런 형태의 석탑은 이곳이 처음이다. 그러나 여기서 급박한 상승감과 거친 질감만 느껴질 뿐 양감이나 가로-세로 비율에 따른 보기 좋은 조화는 찾아볼 수 없다. 아니 그것이 운주사 석탑들의 독특한 매력일지도.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운주사는 밀교적인 냄새가 강하다고도 한다. 이른바 X자나 V자, 마름모 무늬, 네 잎의 꽃 문양 등이 밀교에서 주로 쓰던 문양이라는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길손들에게 이는 그저 무의미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 모르지만, 독특한 모습을 한 석탑들이 왜 유독 이곳 천불산 다탑봉 계곡에만 몰려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현재 천불천탑이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원래 천불천탑이 있었는지도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황석영이 소설 <장길산>에서 999개의 석불과 석탑을 만들다가 마지막 석불을 만들다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쓰고 있고, 1530년 증보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능성현(綾城縣)’조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데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씩 있고, 또 석실도 있는데 두 석불이 등을 마주 대고 앉아 있다”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 1632년 <능주읍지(綾州邑誌)>에도 “운주사는 현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천불산 좌우 산 계곡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기씩 있고 석실에는 두 개의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고 쓰여 있다.

▲ 1910년 11월 15일 조사한 결과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되어 있다. 왼쪽 것은 당시 일본인 세키노가 찍은 것이고, 오른쪽 사진은 최근 것이다.
ⓒ 권기봉
11세기에 세워지고 12~13세기에 걸쳐 석탑과 석불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운주사. 그러나 <능주읍지> 등에 ‘금폐(今廢)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소실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론할 뿐이다.

그러나 돌로 만들어졌던 것만큼 석탑과 석불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 게다. 1942년까지만 해도 30기의 석탑과 213기의 석불이 남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다만 지금은 일부라도 남아 있는 석탑 21기와 석불 100여기 정도가 쓸쓸히 서있는 운주사. 다른 폐사지의 경우처럼 넓고 반듯한 석재들은 지역 주민들에 의해 장독대나 봉당의 섬돌로 쓰였음직하고 불상 역시 안 마당의 장식용 석재로 옮겨갔을 가능성도 크다. 게다가 다탑봉 계곡에 들어선 현대판 운주사 건물 때문에 애초의 폐허 같았다던 경관은 크게 훼손된 상태다. 물론 지금 천불천탑을 모두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고, 또 모두 남아 있다고 해서 운주사의 느낌이 더 강렬할지는 알 수 없지만.

▲ 공사바위에 오르면 운주사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비 안개 자욱한 운주사를 보다.
ⓒ 권기봉
공사바위에 올라 운주사를 보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계곡에 널려 있는 석탑과 석불들을 마음에 담아 보자. 1918년 박윤동과 김여수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한 이후 관광지처럼 변해 말끔하게 닦인 도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는 천불천탑이지만, 인공의 흔적이 확연히 느껴지는 잔디와 정원수가 아닌, 들풀과 나무들이 서 있을 모습을 마음 속에 그려 보자. 물론 운주사 조성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폐사지에서는 어쩐지 ‘폐허’ 그대로의 느낌이 더 강렬히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나무’를 보았으면 이제 ‘숲’을 한번 보자.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마치 항아리를 몇 개 쌓아 올려 만든 것 같은 탑이 있다. 이것도 탑이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지만 이곳은 운주사가 아니던가! 산을 오르면 갑자기 큰 바위가 눈 앞을 막아선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운주사 조성 당시 공사 책임자가 이 바위에 앉아 공사를 지휘했다고 해서 공사 바위라고 불린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에 오르면 운주사 계곡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 안개 자욱한 운주사, 그리고 잿빛 하늘.

▲ 물동이를 엎어 놓은 듯한 독특한 모양의 탑으로, 역시 왼쪽은 세키노 일행이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물동이 모양의 탑신이 7개에서 4개로 훼손된 모습을 볼 수 있다.
ⓒ 권기봉
운주사는 전설을 싣고…

과연 공사 책임자는 이곳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또 무슨 명령을 내렸을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 전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운주사의 창건과 관련한 궁금증이 쉬 사라지지 않는다. 그와 관련해 정말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그 이야기만으로 단행본이 나올 정도다.

먼저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 있어 이 운주사터를 왕혈로 보고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공사 당시 현장을 관리 감독하던 시위불이 장난으로 닭울음 소리를 내 날이 샜다고 하는 바람에 999번째와 마지막 1000번째 불상, 즉 두 와불(臥佛; 누워있는 부처)을 못 세웠다는 것이다.

이 외에 산천비보와 관련한 전설도 전한다. 역시 도선국사가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인데, 당시 한반도의 지세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 오른쪽, 즉 일본쪽으로 좋은 운이 기운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에 한반도의 서쪽인 운주사 자리에 천불천탑을 세워 무게를 맞춤으로써 운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이야기다.

▲ 앞뒤가 얇은 바위에 새겨진 석불들이 운주사 경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손 모양이 제각각이고 크기 역시 개성 만점이다. 암벽 위에 보이는 것은 일명 '거지탑'.
ⓒ 권기봉
또 당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이 나라의 만세 번영을 위하여 건설했다는 이야기나, 중국 설화에 자주 나오는 마고할미가 지었다는 전설 등이 전한다. 특이하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재구 학예연구관은 1270년경 몽고가 고려를 침략했을 당시 몽고군이 만든 것이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많고 많은 창건 설화. 결국 긴 시간을 이어 오면서 옛 사람들도 역시나 운주사를 신기하게 여겼던 탓일까. 물론 어느 것 하나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나, 누구는 석공들이 연습하는 실습장이었다고도 하고, 누구는 말 그대로 천지개벽을 염원하던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등 신비에 쌓인 운주사다운 전설이 아닐 수 없다.

와불의 육계는 왜 잘렸을까?

공사바위에서 내려가 서쪽 산마루에 오르면 와불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운주사를 찾는 이유 중 하나인 와불이다. 그 크기도 크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누워있는 독특한 모습과 황석영의 <장길산>에 의해 더 유명해진 이 와불은,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미륵 신앙과 함께 사람들 뇌리에 박혀 있다.

▲ 운주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인 와불이다. 일으키려다 넘어진 것이라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한편 오른쪽에는 예리하게 절단된 육계 부분이 남아 있다.
ⓒ 이선주
그러나 야속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시행한 두 차례의 학술 조사와 네 차례의 발굴 조사에서 운주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가능해진다. 일으키려다 넘어진 와불이 아니라 아예 일어서지 못한 와불인 것이다. 와불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허리 아래 부분에는 정으로 쪼아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와불을 암반에서 떼어내려 한 흔적이 보이지만, 허리부터 머리 부분까지는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석불들에서 보듯 이 일대의 암석들이 편평한 층으로 쪼개지는데 반해 유독 이 와불을 새긴 바위만은 그 층이 아래로 휘어내려가 쪼갤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확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쐐기를 박았던 흔적이 그러하니 그와 같이 추정할 수밖에.

다만 아쉬운 것은 두 와불 중 보다 큰 와불의 육계가 마치 예리한 칼로 절단한 듯 잘라져 있다. 와불 옆에 세워져 있는 돌 덩이가 그것인데, 와불의 몸체에도 곳곳에 훼손하려는 듯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와불을 만든 이후 누군가가 훼손하려 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 운주사 와불을 보고 언젠가 이 세상에 나타나 용화세계로 이끌어 줄 미륵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믿음을 뿌리부터 자르기 위함인가? 이유를 알 수 없어 그저 상상에 그칠 뿐이지만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와불이 있는 곳에서 완전히 내려오지 않고 길을 따라 계곡과 평행하게 걷다 보면 부분적으로 예리하게 잘려나간 암반을 볼 수 있다. 쐐기를 박았던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불상을 조각한 후 떼어낸 흔적이 아닌가 싶다. 즉 이전에 보았던 와불과 같이 조각을 먼저 한 후 떼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실제로 운주사에 널려 있는 석불들은 대부분 앞뒤가 날씬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일대 암석들이 대부분 판형으로 쪼개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주사의 탑은 별자리를 본뜻 것이라는데?

여기서 한 사람 정도 다닐만한 오솔길을 다라 걷다 보면 문제의 칠성 바위에 닿는다. 사람이 깎은 일곱 개의 둥그런 바위가 마치 북두칠성처럼 놓여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북두칠성을 반대로 엎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지난 1999년 4월 3일 KBS <역사스페셜>을 통해 방영된 바 있어 운주사를 찾는 이라면 빼놓지 않고 둘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 운주사에 있는 석탑과 석불들은 이 지역의 암석을 갖고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계곡 여기저기에 돌을 따낸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구멍을 뚫고 나무 쐐기를 박은 다음 물을 부어 불림으로써 돌을 따냈다고 한다.
ⓒ 권기봉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 이 돌들은 지름이 2.7m에서 3.85m에 이르고, 두께도 29cm에서 35cm나 되는 등 매우 큰데, 실제 북두칠성의 밝기 등급과 같이 밝은 것은 크고 어두워질수록 돌의 크기 역시 차례로 작아지고 있다. 또 운주사 경내에 흩어져 있는 탑들의 배치 역시 일등성의 배치와 같다는 주장이다. 정말일까?

신기하기는 하지만 그대로 동의하기에는 무리인 것이 사실이다. <과학동아> 전용훈 기자도 지적했듯, 운주사의 탑 배치는 창건 당시의 것 그대로가 아니라 후대에 변화된 것이다. 실제로 1800년대 자우 스님이 운주사를 수리할 때 다른 데서 옮겨온 석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산 속에 흩어져 있거나 민가에 있던 것을 다시 옮겨 놓은 사례가 있다. 즉 지금의 석탑 배치는 말 그대로 요즘의 배치일 뿐이지, 운주사 창건 당시의 배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실제 별자리와 일치하지 않는 탑의 배치가 상당수 눈에 띌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역사스페셜>에서 말하고 있는 별자리는 고려시대 사람들이 보던 별자리와는 다른 서양의 별자리라는 것이다. 즉 고려 사람들이 만든 천불천탑이라면 북극성과 북두칠성 외에 자미원과 태미원, 천시원 등의 3원과 28수를 그렸어야 한다는 얘기다.

L형, 시간이 지나면 철이 좀 들까요?

터벅터벅 배낭 하나 짊어지고 떠나온 여행객에게 그것은 무의미한 논쟁일지도 모른다. 여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지식 하나를 얻는 것보다 무엇을 보고, 느끼고, 또 깨닫는가가 아닌가 싶다. 바로 거기에 여행 혹은 떠남의 매력이 있고, 또 그러하기에 바쁜 일상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 먼 구석의 운주사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게 아닐까.

▲ 다양한 모양의 석불들이 있는데, 특히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모아이’처럼 생긴 얼굴과 마치 외계인처럼 생긴 얼굴도 볼 수 있다.
ⓒ 권기봉
보통 여행을 할 때에는 어느 고속도로를 타고 언제 국도로 빠져야 길이 막히지 않는지 걱정하게 된다. 어떤 과정을 거쳐 가는가 보다 어디를 제 시간 안에 가야 하느냐가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큰 깨달음이 없다면 결국 돌아오고야 말 것을, 왜 이리도 서둘러 왔을까.

잠시 마음을 놓을 일이다. 때론 길이 막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차 안에서 쓸쓸한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면, 때론 버스를 놓쳐 터미널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을 구경해야 한다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 상황을 즐겨보면 어떨까. 차창을 스치는 비를 배경으로 Bread의 'If'와 함께, 제각기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이들의 기대와 향수, 실망 혹은 걱정 섞인 시선과 함께.

그러나 이런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운주사의 매력에 흠씬 젖어들기에는 내공을 더 쌓아야만 할 것 같다. 이번에도 운주사를 그 자체로서의 운주사로 보지 못하고 속 좁게도 분석하고 기록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다만 이런 말이라도 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다짐은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쓰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L형, 형 나이쯤 되면 저도 철이 좀 들까요?

관련
기사
여행이란 삶의 찌꺼기를 버리는 과정


남도 별미 ‘추어탕’ 한 그릇 하시겠어요?
화순 ‘운주사’ 가는 방법

▲ 운주사 가는 방법
ⓒ운주사


황석영의 <장길산>을 통해 특히 유명해진 운주사. 외딴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에 걸맞게 대중교통 역시 그리 불편하지 않다.

1) 대중교통

서울을 기준으로, 광주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간 다음 화순 운주사 가는 시외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서울서 광주까지 가는 고속버스는 거의 5분 간격으로 자주 있으며, 막히지 않으면 4시간 정도 걸린다. 도 부산이나 대구, 대전 등에서도 각각 20분 간격, 50분 간격, 30분 간격으로 있다.

기차의 경우에는 서울에서 광주까지 하루 14회 운행되며, 4시간 20분이 걸린다. 부산에서는 하루 2회 기차가 있으며 7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광주까지 갔다고 다 간 것은 아니다. 다시 화순으로 들어가야 한다. 광주 광천터미널 앞에서 318번이나 218번 운주사행 버스를 타면되는데, 1시간 간격으로 배차된다. 광주대학교를 기준으로 새벽 6시 25분부터 밤 9시 30분까지 화순으로 가는 버스가 다닌다.

2) 자가용

만약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해야겠다면, 광주에서 너릿재터널을 지나 국도 22번을 타고 화순읍까지 온 다음, 화순중앙병원 네거리에서 우회전 해 국도 29번을 타고 능주까지 간다. 거기서 822번 지방도를 타고 도곡(효산)리를 지나 평리 네거리에서 좌회전 하고 817번 지방도를 따라 도암면 소재지까지 간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도암 삼거리에서 쭉 가면 월전마을과 용강 저수지를 지나 운주사에 닿을 수 있다. 웬만하면 지도를 참고하자.

3) 잠깐! 떠나기 전에.

여행에 있어 사전 준비는 필수다. 지도를 챙기는 것을 시작으로 운주사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을 쌓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운주사 홈페이지(www.unjusa.org)에 가면 운주사에 관련된 각종 정보를 볼 수 있고, 여름에는 보기 힘든 운주사의 겨울 풍경을 구경할 수도 있다. 문의 061- 374-0660

4) 남도 별미 ‘추어탕’ 한 그릇 하시겠어요?

한편 오랜만에 남도 여행을 하는 이라면 별미를 맛볼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운주사 초입에 있는 용강식당(061-374-0920)은 추어숙회와 추어탕으로 유명하다. 추어숙회는 2~3만원이며, 추어탕은 6000원이다. 또 이 집에서는 숙박도 할 수 있는데, 2만원이면 4인 가족이 너끈히 잘 수 있는 방 하나를 빌릴 수 있다. / 권기봉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