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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기연(좌)씨와 원영순씨 모녀. 그들의 개인사는 사할린 한인사를 넘어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슴 저며지는 고발이었다.
 윈기연(좌)씨와 원영순씨 모녀. 그들의 개인사는 사할린 한인사를 넘어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슴 저며지는 고발이었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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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중순인데도 유즈노 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에는 벌써 스산한 바람이 분다. 임박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함인지 묘지에 서식하는 까마귀 떼조차 성묘객이 두고간 제물을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는 듯 가쁜 비행을 거듭한다.

그러나 그들의 법석과는 달리 남편이자 아버지인 고 원수원씨의 묘를 찾은 두 여인은 보드카 한 병과 방울 토마토 3알, 그리고 세 개의 초콜릿을 놓고 조용히 절을 올릴 뿐이다.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올해 76세의 원기연씨는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에서, 큰딸 원영순씨는 러시아의 서쪽 끝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날아왔다. 유즈노 사할린스크는 그들이 서로의 시공간으로 흩어지기 전 살던 곳이다.

"저는 2007년 10월 초이렛날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했어요. 그 뒤로 2년에 한 번 정도 이렇게 자식들하고 남편 묘를 찾아요. 자식으로는 같이 온 의학박사인 큰딸과 그 아래로 서이가 있어요. 애들이 아버지는 없었지만 공부는 참 열심히 했지요."

유즈노 사할린스크 남쪽에 있는 제1공동묘지를 주변을 지나다 우연히 만난 원기연씨 모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녀의 개인사를 넘어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나아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깊은 성찰을 촉구하는, 가슴 저린 고발이었다.

"꿈에 그리던 영주귀국... 그러나"

원기연씨는 일본 정부의 자금 지원(2010년 7월 현재 700여억 원)으로 2000년 2월부터 시작한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사업'을 통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자녀들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서로 남남이던 다른 여성과 함께 영주귀국을 해야만 했다. 규정상 '2인1조' 여야 신청이 가능해, 원씨처럼 배우자를 먼저 떠나 보냈거나 이혼을 했거나 애초부터 독신이었던 이들도 여하튼 다른 사람과 짝을 이뤄야만 신청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적은 이들이지만 이렇게 대학교 기숙사처럼 2인 1조로 무작정 짝을 지어야 그나마 영주귀국 할 수 있도록, '고국'은 규정하고 있다. 그마저도 '1세'나 '1세와 함께 사할린으로 넘어왔거나 해방 전 태어난 2세'만 영주귀국을 할 수 있기에 원기영씨의 딸 영순씨와 같은 3세에게는 신청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고국에 의해 '신(新) 이산가족'이 양산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영주귀국을 했다고 해도 그 삶은 한겨울 사할린의 풍설(風雪)만큼이나 강퍅하기 그지 없다. 영주귀국자의 거개가 노년층이기에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되어 1인당 매달 약 34만 원의 보조금을 받기는 하나, 주택임대료에 각종 공과금, 그리고 생활비를 제하면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없다. 지난 2008년 1월 노령연금법이 개정되면서부터는 8만4천 원 정도의 연금마저 끊긴 실정이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다. 한푼이라도 벌이가 생기면 그때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 대상자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인가. 누군가는 이를 두고 '2인 1실짜리 반(半)수용소 생활'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원기연씨가 이처럼 '국민이되 비(非)국민' 같은 처지가 된 연유를 알고자 한다면 그 자신의 역사,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한층 비극적이던 지난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41년 가을인지 42년 봄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여하튼 그때 우리 가족은 경남 통영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삭쬬르스크로 징용돼 간 거예요. 아버지가 징용된 이듬해 어머니와 저, 그리고 동생 둘도 삭쬬르스크로 왔고요."

일제 때 '토로(塔路)'라 불렸던 삭쬬르스크는 사할린 섬의 중서부에 있는 도시로, 일본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석탄을 채굴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일제는 당시 "모집" 혹은 "관(官) 알선"이라는 이른바 '자원'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조선의 경제 구조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상태였기에 밥벌이를 위한 선택지가 없었고, 설령 모집에 '자원'해 사할린에 왔다고 하더라도 조선인은 일신의 자유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폭압적인 노동 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렇기에 원씨의 말마따나 이곳 조선인들의 삶이란 '노예 생활'에 다름 아니었다.

"아버지 없이 산 68년... 조국은 어디에"

특히 원씨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8월, 사할린에서 일본 본토의 정반대편에 있는 큐슈로 다시 징용되고 만다. 미군 잠수함에 의해 사할린과 홋카이도 간 물류가 힘들어져 고안해낸 이른바 '이중징용'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초, 사망했다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이다.

아버지 없이 살아야 했던 지난 68년. 원기연씨는 최근 아버지를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돌아간 아버지를 되살릴 수는 없는 일. 자신이 그의 딸임을, 나아가 아버지나 자신이나 강제동원의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가 할 수 있는 '아버지를 위한 작지만 의미있는 명예회복'이다. 그러나 한국 현실에서,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원기연씨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의 묘 주변에 그가 좋아했다는 보드카를 뿌렸다. 그녀의 눈가는 어느샌가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원기연씨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의 묘 주변에 그가 좋아했다는 보드카를 뿌렸다. 그녀의 눈가는 어느샌가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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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은 원씨로 살고 있지만 결혼 전에는 황씨였어요. 원기연이 아니라 황기연. 그런데 53년에 결혼을 하면서 소련 법대로 남편 성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이나 저나 자식들이나 하나 같이 원씨예요."

바로 그런 이유로, 그나 그의 아버지 모두 강제동원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호적 등본에 '황덕부의 딸 황기연'이라고는 적혀 있었지만, 동사무소에서는 "당신은 법적으로는 황기연이 아니라 원기연이기 때문에 호적 등본은 떼어줄 수 없다"고 말했다. 호적 등본을 뗄 수 없으니 강제동원 피해자 인정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법원에 가서 성을 원씨에서 황씨로 다시 바꾸면 호적 등본을 떼어줄 수 있다고 하지만, 원씨는 "그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니라 정부가 먼저 능동적으로 나서서 해줘야 하는 최소한의 서비스이자 역사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말을 잇는다.

"2세인 우리도 벌써 60~80대 노인들이에요. 조금 있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죽는데, 한국 정부는 이런 요구를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다 죽을 때까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건가요?"

비슷한 이유로, 부친이 사망한 뒤 모친이 새 결혼을 해서 성이 바뀐 아이들과 그 모친 등도 정부의 지원 대상에서는 일찌감치 멀어져 있는 상태이다. 법 적용의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관료주의적 태도로 인해 해방이 되었음에도 해방되지 않은 인생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럿이다.

한평생 서러운 인생... 여전히 야속한 세상

사할린의 풍경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원기연씨의 딸 원영순씨가 그러하듯 3~4세에 이르러서부터는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이가 기하급수적으로 줄고 있다. 지난 60년대 초까지 32개나 있던 조선학교가 모두 문을 닫은 데다, 러시아인과의 결혼도 많아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덩달아 한인들의 공동체성도 적잖이 옅어지고 있다.

 2년마다 남편이자 아버지의 묘를 찾는 원기연씨 모녀.
 2년마다 남편이자 아버지의 묘를 찾는 원기연씨 모녀.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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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원씨는 이중징용으로 누구보다 서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일제 치하 조선에서 함께 온 아이 셋에 이곳에서 낳은 유복자까지 4명의 자식을 아비 없이 홀로 길러낸 어머니의 묘마저, 이제는 찾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대도시인 유즈노 사할린스크의 그것과는 달리 그가 이전에 살던 삭쬬르스크의 규모가 지금은 소읍마냥 줄어들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역시 급감했기 때문이다. 묘지를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묘지는 이제 울창한 숲으로 변한 지 오래인 데다 묘비마저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기에 이내 썩어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고 한다. 원씨는 "못난 자식, 부모 묘도 못 찾고 이렇게 살고 있다"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삭쬬르스크만의 문제일까. 이제 남편의 묘가 있는 이 공동묘지도 약 2년 뒤에는 영영 사라질 판이다. 택지개발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격년으로 묘를 찾아 남편을 만나고 가지만, 다음 방문 때에도 이 묘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저 그가 한평생 살아온 것 마냥 시대와 세월에 맡겨야 할까? 그저 야속할 뿐이다.

우연하게 마주친 원씨 일행과의 짤막한 대화를 끝낸 나는 이제 자리를 떠야 했다. 그때 원기연씨가 '과자 같은 건 먹어도 된다'며 제물로 놓았던 초콜릿을 다시 주워 건넸다. 초콜릿 속에는 사할린 명물이라는 산딸기 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굶주림에 지칠 때면 몰래 따먹었다는 산딸기가 바로 이런 맛이었을까.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는 지난 8월 13일부터 9월 7일까지 26일 동안 러시아 사할린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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