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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풍납토성의 전경
ⓒ 서울역사박물관
"북으로는 한 수에 접하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가로막혔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으니 이 곳이 도읍을 정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할 당시의 지리적 조건으로서 '삼국사기'에 남은 기록이다. 이 위례성이 정확히 어디인지 아직도 논란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한강의 제방'에서 '위례성'으로 엄청난 위상의 변화를 겪은 곳이 있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당지구 사적
ⓒ 서울역사박물관
풍납토성!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풍납토성은 현재에도 서벽에서 발굴된 해자의 성격을 놓고 한창 논쟁 중이다. 이 역사적 토성의 성벽이 허물어진 곳에 자리잡은 시장에서는 이 토성 내 주민들의 왁자지껄한 활기가 시작되고 있다.

사실, 이 토성 내의 주민들은 엄청나게 발굴되고 있는 백제 유적으로 인하여 땅과 건물의 재산가치가 훼손 당하고 있다. 이 엄청난 유적이 왜 토성 내 주민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는가? 그것은 1963년에 풍납토성을 사적 11호로 지정하면서 성 내부는 놔두고 성벽만 사적으로 지정한 정부의 근시안적 태도 때문이었다.

▲ 풍납토성 무너진 성벽에 자리잡은 시장의 활기찬 모습
ⓒ 노시경
또한 저명한 일부 사학자들이 이곳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성(蛇城)'이라고 주장하면서 일은 계속 꼬여만 갔다. 그리고 과거에는 섬이었던 잠실이 육지로 이어지면서, 사방에서 접근이 어렵던 천혜의 요새, 풍납토성은 일직선 한강변에 자리잡은 보조성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수 백년 역사의 도읍지 유적을 깔아뭉개고 고층 아파트가 성내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 후 엄청난 발견이 계속되면서, 재건축이 무산된 '강남' 송파구의 풍납 1,2동 주민들은 이 곳을 떠나가게 되었다.

풍납토성을 10여년 전에 찾았을 때는 성벽 주변에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었고 성벽 관리도 엉망이었다. 지금도 백제 493년 도읍지의 화려한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풍납토성 서쪽을 차를 타고 지날 때, 내가 풍납토성의 유구함을 말하자 아내가 나에게 하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은 아파트도 많고 남아있는 것도 없잖아?"

▲ 새로 사적으로 지정된 경당지구 유적. 잔디밭 위 햇살이 따갑다.
ⓒ 노시경
▲ 경당 유적 사적지의 경고문. 유적에 대한 설명문이 아닌게 아쉽다.
ⓒ 노시경
풍납토성 여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을 풀어나가는 수수께끼와 같은 여행이다. 이 수수께끼의 열쇠는 풍납토성 지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97년부터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이 이어지면서 풍납토성이 백제의 건국 당시부터 건립된 하남위례성임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특히 1999년 12월에 풍납토성 안 풍납 1동 136번지 경당연립 재건축지역의 지하 4∼5m 내외에서 계속하여 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경당지구 유적으로 발길을 돌렸다.

풍납토성 지도를 머리 속에 담고 풍납토성 동벽을 타고 걷다가 동문터로 추정되는 큰길에서 풍납 초등학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주변의 할아버지에게 물으니 경당유적의 위치를 모른다고 한다. 조금 더 가서 한 슈퍼에서 아저씨에게 물으니 풍납 초등학교 북단의 한 공터가 경당지구 유적이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시는데,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다.

경당연립 재건축이 무산되면서 토성 내에서의 더 이상의 재건축은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발길을 돌려서 풍납 초등학교 쪽으로 향한다.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땀이 나기 시작한다. 풍납 초등학교를 지나치면서 마음이 뿌듯해진다. 그 위치도 풍납토성의 한복판이고, 운동장은 전혀 파헤쳐지지 않았기에 그 아래에 위례성의 왕궁 유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경당사적 9호유구의 전경
ⓒ 한신대학교 박물관
과거에 재건축을 추진하면서 육중한 담으로 막혀 있던 경당 유적은 이제 국가지정 사적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유적지 앞에는 사적을 설명하기보다는 사적에 접근하지 말라는 살벌한 경고문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지하의 유적은 흙으로 다시 덮인 채 그 위에는 싱그러운 잔디가 햇살을 받으며 반짝거리고 있고, 물을 빼기 위한 배수로까지 만들어져 있다. 지금은 황량한 빈터로 나 같은 일반인들의 입장을 막고 있지만, 그 유적을 지하에 그대로 보존하고 그 위에 그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경당지구 사적에는 동명왕묘(東明王廟)로 추정되는 목조 건축물이 있었고, 이 건물이 일시에 불타 쓰러진 곳의 바로 옆에서 말 아래턱뼈가 모두 12개나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말의 다른 부위는 보이지 않고 말의 머리뼈 부분만 고급토기와 함께 발굴되었다.

말은 고대사회에서는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값비싼 동물이었고, 말은 신분의 상징이자 전쟁시에는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었다. 말은 제사에 바쳐지는 희생물 중에서 소보다 한 등급 위였다. 말이 제사용 건물 주변의 구덩이에서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백제의 왕들이 이 곳에서 말을 희생물로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을까?

▲ 9호 유구에 1,500년 동안 쌓인 세월의 흔적
ⓒ 한신대학교 박물관
나의 머리 속은 백제의 '말'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본다. 먼저 한국 역사책의 베스트셀러 <삼국사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비류왕 10년 정월에 남교(南郊)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내었는데, 왕이 친히 희생(犧牲, 제사에 바치는 동물)을 베었다."

왕이 직접 말과 같은 제사 동물의 목을 베었음을 보여준다. 이 역사적 기록과 같이 경당 유적의 구덩이에서 발견된 말도 머리만 베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말의 머리가 제사의 희생제물이기에 말뼈가 출토된 구덩이 바로 옆의 특수한 건물지도 제사용 건물인 것이다.

풍납토성 주변의 이성산성 8각 건물 터에서도 이와 같은 제사용의 말 인형이 발굴되었다. 세월이 점점 흘러 통일신라로 추정되는 시기에는 실물이 아닌 말 인형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 9호 유구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말의 아래턱뼈가 발굴되었다.
ⓒ 한신대학교 박물관
<삼국사기> 의 또 다른 제사 기록으로 들어가 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는 이렇게 쓰여있다.

"665년(신라 문무왕 5년) 가을 8월에 왕이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륭과 함께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맺었다. 이때에 흰말을 잡아 맹세하였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내와 골짜기 신에게 제사지낸 후 그 피를 마셨다. 피를 마신 다음 희생과 예물을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그 글을 우리 종묘에 간직하였다"

이 기록 또한 삼국시대에 말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고, 이 모습은 이 제사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이 어떻게 희생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제사용 말은 신성하게 보이는 백마가 사용되었고, 그 백마를 이용하여 천신 등에게 제사 지낸 후 그 백마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셨다. 피를 마신 다음 희생된 말을 제단 주위에 묻은 것까지도 너무 똑 같다.

왕이 여러 귀족들을 거느리고 말의 머리를 베고 말의 피를 마시는 모습이 전쟁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백제의 왕은 이 곳에서 왕족을 포함한 귀족들과 말의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결속을 과시한 것이다. 자주색의 소매가 큰 두루마기(紫大袖袍)로 입가에 흘러내리는 말의 피를 닦으면서 말이다.

말머리가 올려진 고대 백제의 제사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가지고 재조합을 해보자. 이 9호 유구에서는 말 뼈뿐만 아니라 2천 점이 넘는 토기류와 함께 각종 유리구슬, 말 모양 토우, 도미 등의 어류, 조류, 소, 돼지 등의 뼈가 같이 출토되었다.

토기류 중에서 많은 수를 차지하는 토기는 고배(굽다리가 높은 접시)와 삼족기(다리가 3개인 토기)와 같은 제사용 토기이다. 목이 베어진 말을 제단의 중심에 올리고, 희생마 주변에는 고배와 삼족기에 조리된 음식을 담아 요새의 돌잔치 상같이 최대한 높이 쌓아 올렸다.

삼족기와 고배에는 조상과 신에게 바치는 소고기, 돼지고기, 새고기, 도미 등의 어류가 분명히 놓여 있었다.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우리의 전통 제사를 고려하여 더 상상의 나래를 펴 보자. 이 제사상에는 깨끗하고 정결한 정수(淨水)와 잡곡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도 겸했을 백제의 왕은 금꽃(金花)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烏羅冠)을 쓰고, 여러 개의 유리 구슬로 몸을 장식하고 제사를 집정했을 것이다.

고대 백제의 제사상 한 가운데에 말의 베어진 머리가 올려져 있었던 것을 그려보면 어떤 모습이 상상되는가? 바로 우리와 친근한 돼지머리이다. 말머리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우리 고유의 풍습은 현대의 한국인들이 고사를 지낼 때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풍습으로 끈질기게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와 과거가 다른 점은 돼지 머리를 지정된 도정업자만이 자를 수 있고, 또한 그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듯 동물머리를 제사상에 올리는 우리의 전통은 외국인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다. '히딩크'가 한국에서 돼지머리로 고사를 지내면서 돼지 코에 지폐를 꽂으며 하던 말 'Surprise, Surprise!'가 자꾸 떠오른다.

비 온 뒤 아침의 강렬한 햇살은 이 경당지구 사적을 계속 감싸고 떠날 줄을 모른다. 이 푸른 잔디밭 위에 백제왕과 신하들이 도열하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천 오백년 전, 고구려와 자웅을 겨루던 백제인들의 강건한 기상이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랑스러운 나의 딸이 핸드폰을 울린다.

"아빠 어디에 가 있어? 빨리 와! 같이 놀러가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나에게는 나의 현실이 다시 이어지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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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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