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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경성제대 본관이 끈질긴 생명을 유지한 채 아직도 남아 있다.
ⓒ 권기봉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현기영(62)씨가 한국문화예술진흥원(문예진흥원) 새 원장으로 지난 2월 17일 임명됐다. 당시 주요 언론들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운동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활동 등을 활발히 벌여온 진보적 문인이 문예진흥원 원장으로 임명된 데 대해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도대체 문예진흥원이란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기에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 및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 1973년 3월 30일에 설립된 특수법인. 그랬다. 해방 이후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전혀 없던 시절, 1968년 7월 발족한 문화공보부에 이어 1972년 8월 14일 법률 제2337조로 제정 공포된 문화예술진흥법은 놀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법에 따라 만들어진 문예진흥원은 이후 1973년 7월 11일부터 전국 극장에서 문예진흥기금을 모금하기 시작, 특히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이 시행되기 시작한 1974년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나간다.

▲ 1930년대 초 경성제대 모습으로, 사진 왼쪽 건물이 도서관이고 오른쪽이 법문학부 건물이다.
ⓒ 권기봉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눈에 띈다. "한 겨레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힘은 그 민족의 예술적, 문화적 창의력이다"라고 선언했던(1973년 10월에 발표한 '문예중흥선언' 중) 문예진흥원이 입주한 건물이 다름 아닌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경성제대) 본관.

분명 경성제대는 일제 시대 당시 조선의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세운 대학이라고 알고 있거늘, 그곳에서 대한민국의 예술적, 문화적 창의력을 계발한다?

"…국민의 도덕을 충실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에서 근대적인 대학교육이 시작된 것은 1922년 '개정조선교육령'이 공포된 지 2년 뒤인 1924년 5월 1일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어 대학 예과(豫科)가 개설되면서부터다. 물론 일제 시대 때다.

이때 함께 공포된 예과 규정을 살펴보면 "동대학 예과는 동대학 학부에 입학하려는 자에 대하여 고등보통교육을 완성시키고 특히 국민의 도덕을 충실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말이 나온다.

짐작하다시피 '국민'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을 가리키는 것으로, 경성제대는 조선이 아닌 일제를 위해 설립되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언한 셈이다.

당시는 일제가 '문화통치'를 펴던 시기로 한반도 통치를 용이하게끔 하는데 경성제대의 설립 목적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성격을 반영이라도 하듯 개교 초기 총독부 정무총감이 예과 학사업무를 관장했는데, 1926년 3년제 법문학부 및 4년제 의학부가 개설되고 나서야 동경제대 문학부 교수였던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가 초대 총장으로 부임했다.

▲ 경성제대는 조선인들의 고등교육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일제의 제국주의적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법률 연구와 통치에 필요한 관리양성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 권기봉
당시 조선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유일무이했던 대학인 경성제대에 가려면 이 대학 예과를 수료했거나 다른 대학의 예과나 고등학교, 전문학교를 졸업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누구나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924년 첫 입학생을 받을 당시 응시자 658명 중 총합격자는 170명(경쟁률 3.9:1 )이었는데, 그 중 조선인은 45명이었다고 한다.

조선 땅에 사는 사람은 아무래도 조선인이 훨씬 많았을 텐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많은 이들은 당시 입학시험에 일본 역사나 한문 훈독처럼 조선인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출제되어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1926년의 경우 전체 학생 150명 중 조선인 47명, 1941년에는 전체 학생 611명 중 조선인이 216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교수의 경우에는 각각 전체 교수 57명 중 조선인 5명(1926년), 140명의 교수 중 조선인 교수가 1명(1941년)이었다고 한다.

경성제대에 법문학부가 설치된 이유는…

이 같은 사실에 대해 일본 와세다대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낸 송한용씨는 논문 <일본의 식민지 대학 교육 정책 비교 연구 - 경성제국대학과 만주건국대학을 중심으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제의 교육정책, 특히 대학교육의 목표는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서구와는 다른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의 창출이었다"며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들고 있다.

나아가 그는 "일제는 제국주의적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법률 연구와 통치에 필요한 관리양성을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 경성제대의 명칭은 애초 ‘조선제대’일 뻔 했으나, 그렇게 되면 조선을 식민지가 아니라 하나의 제국으로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는 총독부의 판단으로 확정 직전 ‘경성제대’로 바뀌었다.
ⓒ 권기봉
실제로 당시 일제는 조선 내의 대학 설립을 최대한 막고 있었다. 실제로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반도에는 경성제대만이 유일한 대학이었는데, 보성전문이나 연희전문 등 민족 사립학교의 대학 승격 요구를 계속 거부한 결과로 보인다. 즉 일제는 고급 학문을 교육해 괜히 '문제 있는' 조선인을 길러내느니 하급 기술을 가르치는 데 만족했던 것이다.

이는 경성제대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법학과 정치학, 문학, 사학, 철학 등을 담당하는 법문학부와 의학부 등을 두긴 했지만, 유독 정치학과는 1927년 들어 폐과 조치된다. 학과 개설 2년만의 일이다.

그런데 정치학과는 폐과되었다손치더라도 어째서 법학이나 사학, 철학 등은 그대로 두었을까? 아마도 관립학교의 '역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만약 이러한 분야를 관립학교인 경성제대에서 흡수하지 않으면 보성전문 등 사립학교에서 다루려고 했을 테고, 그럴 경우 일제가 우려하는 바가 현실로 나타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학과는 끝내 폐과 조치한 것을 보면 일제도 상당한 고심을 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1927년경 경성제대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이 독서회를 만들어 민족해방운동의 진로에 대해 탐구하는 등 1934년 적발될 때까지 미야케 교수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펼친 바 있다고 한다.

▲ 현재 문예진흥원은 경성제대 본관을 비롯해 도서관과 문리대 본관이 있었던 터를 이용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본관도 그렇지만 경성제대 건물들의 경우 붉은색 벽돌로 지어졌고 아치형 문양이 눈에 많이 띤다.
ⓒ 권기봉
그러나 이것도 '시절 좋을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보다. 일제는 1940년대로 접어듦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전시체제에 돌입, 법문학부 정원은 축소되는 반면 이공계와 의학부 정원은 50%나 늘어난다. 짐작하다시피 학생들에게 전장(戰場)에서 바로 쓸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한 명이라도 더 동원하기 위함이다.





1926년 5월 6일, 경성제대 완공되다

그런데 일제가 경성제대를 세워 자신들을 위한 인재 양성에 열을 올릴 때 국내의 이른바 내로라 하는 인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알려진 바는 별로 없지만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가 경성제대를 설립하기 전인 1920년 6월 이상재(李商在)와 윤치소(尹致昭) 등 1백여 명이 조선교육회설립발기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1922년 11월 이상재와 현상윤(玄相允), 한용운(韓龍雲), 허헌(許憲), 송진우(宋鎭禹) 등이 중심이 되어 민립대학기성준비회 조직,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의 대표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발기인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본격화된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미를 보이자 이에 부담을 느낀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개정, 경성제대를 설립하는 것으로 선수를 친다. 1922년의 일이다.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노니..."
부제 : <민립대학 발기취지서>

오인의 운명을 여하히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차등사(此等事)가 모두 다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기 불능하도다. 하고(何故) 오하면 알고야 동(動)할 것이요. 알고야 일할 것이며 안 이후에야 정치나 외교도 가히 써 발달케 할 것이다. 알지 못하고 어찌 사업의 작위와 성공을 기대하리오.

경언(更言)하면 정치나 외교도 교육을 대(待)하여 비로소 그 작흥(作興)을 기할 것이니 교육은 오인의 진로를 개척함에 재하여 유일한 방편이요, 순단임이 명료하도다.

그런데 교육에도 계단과 종류가 유하여 민중의 보편적인 지식은 차(此)를 보통교육으로써 능히 수여할 수 있으나 그러나 심원한 지식과 온오한 학리는 차를 고등교육에 기(期)치 아니하면 불가할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사회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유위(有能有爲)의 인물을 양성하려면 최고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은 인류의 진화에 실로 막대한 관계가 유하나니 문화의 발달과 생활의 향상은 대학은 대(待)하여 비로소 기도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도다. 시관(試觀)하라. 저 구미의 문화와 구미인의 생활도 그 발달과 향상의 원동력은 전혀 대학에 게재하나니 희(噫)라 저들의 운명은 실로 12, 13세기경에 파리대학을 위시하여 이(伊)․영(英)․독(獨)제국에 발연히 성립된 각처의 대학설립으로부터 빛나고 개초(開招)되었다 할 수 있도다. 환언하면 문예부흥도 대학 발흥되고 종교개혁도 대학에서 생기고 영․불의 정치개명도 대학에서 양출하였고 산업혁명도 대학에서 최촉(催促)하였으며 교통도 법률도 의약도 상공업도 모두 다 대학에서 주(鑄)한 것이로다.

그러므로 금에 오인 조선인도 세계의 일우(一隅)에서 문화민족의 일원으로 타인과 견(肩)을 병(竝)하여 오인의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을 사(捨)하고는 경(更)히 타도(他道)가 무(無)하도다.

그런데 만근(挽近) 수삼년 이래로 각지에 향학열이 울연(鬱然)히 발흥되어 학교의 설립과 교육의 시설이 파(頗)히 가관할 것이 다(多)함은 이 실로 오인의 고귀한 자각으로서 출래한 것이다. 일체로 서로 경하(慶賀)할 일이나 그러나 유감 되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도 대학이 무(無)한 일이라. 물론 관립대학도 불원(不遠)에 개교될 터인즉 대학이 전무한 것은 아니나 그러나 반도문운(半島文運)의 장래는 결코 일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바가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도다. 그러므로 吾제는 玆에 감한 바 有여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노니 자매형제로 내찬(來贊)하여 진(進)하여 성(成)하라.

민립대학 기성회

경성제대 본관과 화신백화점을 낳은 손
조선 최고 건축가 '박길룡'은 누구?

▲ 박길룡
1920년부터 1943년 4월 27일 화요일 공평동 사무실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할 때까지 23년간 건축계에 몸담았던 명실 공히 조선 최고 건축가.

12년간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후 1932년 ‘박길룡건축사무소’를 설립하며 전성기를 구가한 박길룡은, 경성제대 본관(1931)은 물론 현재 밀레니엄타워가 있는 곳에 있던 화신백화점(1935), 동일은행 남대문지점(1931), 평양 대동공전 교사(1940, 해방 뒤 김일성대학 교사로 쓰임), 혜화전문학교 본관(1943), 이문당(1943, 옛 신민당 당사로 쓰임) 등 걸작을 남겼다.

그는 건축 그 자체뿐만 아니라 건축 저널리즘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193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 많은 글을 썼으며, 《재래식 주가(住家) 개선에 대하여》와 같은 단행본을 냈을 뿐만 아니라 1941년 4월 15일에는 타블로이드판 4면짜리 월간신문 <건축조선>을 창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친일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박길룡은 일제가 전시체제를 지원할 목적으로 만든 ‘국민총력 조선연맹’ 사무국 문화부 위원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위촉되는 등 적지 않은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권기봉
192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 일대에 3층짜리 예과 건물을 지은 데 이어 1926년 5월 6일 예과 건물 본관과 강당, 도서관 등 경성제대 건물이 완공되었다. 명실공히 황국신민을 키워내는 교육의 물리적 기반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이후 1927년 의학부 교사 등으로 차례로 지으며 기반을 탄탄히 형성해 나간 경성제대는 특히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 일대에 건물들을 추가로 지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1928년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 자리에 세워졌던 법문학부 교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각종 건물들이 들어서는데, 지금 문예진흥원으로 쓰고 있는 경성제대 본관은 지난 1930년 8월 착공해 1931년 10월 완공한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건축 기수(技手)로 있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朴吉龍)이 설계한 것으로 지난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78호로 지정된 바 있는 이 건물은, 그러나 해방이 된 후에도 국립서울대학교의 본부 건물로 쓰였다.

미군정, 국립서울대학교를 만들다

1946년 7월 14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다.

“문교부에서는 앞서 제정한 신교육제도에 맞추어 기왕의 서울대학과 도내의 각종 관립(예외로 치과의전도 포함) 학교를 통틀어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로, 기구와 내용을 고려 9월 신학기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중략) 국립 종합대학교를 두는 것은 기왕 각 학교의 기존 건물과 설비를 최대한 활용하고 유능한 교수의 상호교류와 교육의 연구시간을 많이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 경성제대 본관은 당시 조선총독부 건축 기수였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朴吉龍)이 설계한 것으로 지난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78호로 지정된 바 있다.
ⓒ 권기봉
1946년 7월 13일 문교부장 유억겸 주도로 6-3-3-4 새 학제에 기초해 경성제대와 서울 및 근교의 8개 관립전문학교와 몇몇 사립학교를 통합해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종합대학교로 설립한다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國立서울大學校設立案), 이른바 국대안이다.

이어 1946년 8월 22일 미 군정청 학무국은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령 제102호에 따라 국립종합대학안(國立綜合大學案)을 확정 공포, 국립서울대학교(서울대; 초대 총장은 미국인 해리 안스펫(Hary Anspead))를 정식 발족시킨다. 이때 편성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문리과대학 = 경성제대 법문학부 문과계통 + 이공학부 이과계통
▶ 법과대학 =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과계통 + 경성법학전문학교
▶ 공과대학 = 경성제대 이공학부 공과계통 + 경성공업전문학교 + 경성광산전문학교
▶ 의과대학 = 경성제대 의학부 + 경성의학전문학교
▶ 농과대학 = 수원농림전문학교 흡수 개편
▶ 상과대학 = 경성경제전문학교 흡수 개편
▶ 치과대학 = 사립 경성치과의전 흡수 개편
▶ 사범대학 = 경성사범학교 + 경성여자사범학교 통합 개편
▶ 예술대학 = 미술 및 음악부 신설
▷ 약학대학 = 1950년에 사립 서울대학(구 경성약전)을 흡수해 독립시킴.


▲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대한 동아일보 기사. 민립대학 기성회는 자본금 1천만 원의 모금 운동에 나섰지만 일제의 탄압과 호응 부족으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 권기봉
그러나 국대안은 ‘파동’이란 말을 들을 만큼 큰 반발을 몰고 왔다. 국대안이 발표되자마자 해당 학교의 교수와 학생은 물론 사회민주당과 한국독립당은 물론 조선어학회 등 일반 사회단체들까지 나서 시기와 기술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를 테면 각 건물들이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통합의 의미를 살리기 힘들 것이며, 국대안 자체가 갖는 비민주성으로 인해 대학 자치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점, 그리고 정부도 들어서기 전에 이런 큰 문제를 아무런 논의 없이 진행하기에는 시기상 적절치 않다는 점 등이었다.

미군정이 조속히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마련했던 국대안. 그러나 해방 후 들어온 미군정은 적지 않은 친일 교수와 교장 등을 그대로 재임용함에 따라 동맹휴업 등 큰 반발을 몰고 온 것이다. 작금의 서울대 김민수 교수 재임용 탈락 사유도 결국은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무허가 학교 폐쇄령에 따라 다수의 민족 교육기관이 강제 폐쇄되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도 생겼고, 당시 우리 경제 수준에 맞지 않다고 보았던 6-3-3-4 학제의 강제 적용과 국대안 자체의 강제적인 수용 압박은 장차 교육의 민주화라는 명제와는 거리가 먼 정책들이었다.

경성제대가 가고 서울대가 왔지만 정작 변한 것은 각급 학교들의 통폐합, 그 자체밖에는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 통폐합마저도 스스로의 생각이 아닌 미군정이라는 외지인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언제까지 제국의 유산에서 문예진흥을 논할 건가 ?

▲ 1976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그 부지는 평당 17~19만 원대에 팔렸다. 사진은 당시의 평면도.
ⓒ 권기봉
결국 경성제대 본관은 1975년 3월 서울대가 동숭동을 떠나 관악산 아래로 갈 때까지 약 30년간 서울대 본부 건물로 쓰이다가 1976년 10월부터 문예진흥원 청사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다른 건물들은 대한주택공사에 매각돼 민간 주택지로 분할되어 결국 철거되었다지만 경성제대 본관만은 아직도 문예진흥원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봄답지 않게 점점 강렬해져만 가는 태양빛을 막아주려는 듯 수령 5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마로니에가 지친 행인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주중임에도 불구하고 옷차림도 현란한 재주꾼들이 몰려나와 춤과 노래를 부르고 또 구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문화동네다. 문예진흥원과 문예회관, 미술관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극장도 있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것은 왜일까.

▲ 대한주택공사는 1976년 12월 16일 서울대가 있던 자리에 기념 표지석을 세웠다.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 중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 권기봉
그릇이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의문은 더해 간다. 마치 조선총독부 청사에 수백 년은 됐음직한 국보와 보물을 가득 쌓아놓고 관람객들을 맞았던 예전의 국립중앙박물관이나 해방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대한민국 대법원이 입주해 있던 일제 당시 법원 건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고 심지어 주류(主流)도 바뀐다는데 용케도 경성제대 본관만은 살아남았다.

경성제대 본관’ 찾아가는 방법
경성제대 가는 길은 마로니에 공원 가는 길!

경성제대 본관을 찾아가는 길은 곧 대학로에 가는 길이자 마로니에 공원을 찾아가는 길이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가자. 그럼 바로 왼쪽 전방으로 마로니에 공원이 보이는데 뭐 더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다. 마로니에 공원으로 들어가 애초 지하철 출구를 나와 걸었던 방향으로 보이는 건물이 문예진흥원, 즉 이번의 경성제대 본관이다. / 권기봉
설립 당시 "한 겨레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힘은 그 민족의 예술적, 문화적 창의력"이라고 선언했던 문예진흥원. 과연 예술적, 문화적 창의력을 어떻게 증진시키겠다는 것일까? 혹시 맑디맑은 새 술을 헌 부대에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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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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