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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원래 매를 맞는 고통이란, 그 매가 ‘몇 대’였느냐로만 따질 수 없는 것이다. 깊게는 그 매를 맞음으로써 뭉개지게 되는 나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로부터, 얕게는 매에 동반되는 공포와 긴장과 정신적인 혼돈상태까지, 단지 몸뚱이가 느끼는 쓰라림보다 결코 작지 않을 부산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물 서너 살만 넘어도 (병역)미필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그리고 비로소 병역필자가 되는 순간에 느끼는 해방감이 어떤 것인지도 그 ‘26개월’을 가지고만 상상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흔히 ‘군대생활 2년’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그 길다고 할 수 없을 2년 동안 뒤바뀔 세상과 사람과, 또 자신을 가늠하느라 허공 속에 허우적거리는 막막한 시간을 보내본 사람이라면, 그것의 고통 또한 결코 2년 안에 갇혀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물론, 차마 꺼내 늘어놓기 민망한 어릴 적부터의 공포와 긴장의 시간들은 모두 빼놓고라도 말이다.

2.

“형, 얘기 좀 하죠.”
“얘기? 그러지 뭐. 커피 한 잔 할까?”
“예.”

대학원 2년을 마치고도 수료상태로 논문을 쓰고 있던 5학기의 어느 날, 그리 친하지도 않던 후배 하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전공도 다르고 이것저것 함께할 만한 사이가 아닌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다는 것은 꽤나 긴장되는 일이다. 나는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되는대로 어딘가에 걸터앉았다. 그 후배는 황사바람 얘기로 한바퀴 돌리더니, 곧장 심각한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어제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영장이 나왔대요. 어떡하죠?”
“영장? 왜, 입영원 냈었냐?”
“아니요.”
“그럼 그냥 교학과에서 재학증명서 떼어다가 어디에 내면 될 거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대학원 입학한 게 병무청 쪽에 안 들어가서 그런 걸 테니까, 그냥 간단히 될 거야. 대학원생도 자동으로 입영연기가 되니까.”

나도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막 들어왔을 때, 몇 번인가 병무청의 전화를 받았었다.

“그건 아는데요, 글쎄 어쩔까 싶어서요.”
“어쩔까 싶다니, 뭘?”
“글쎄, 가기는 가야 되는 거니까. 나이도 먹고… 형은 어떻게 할 거예요?”

그 후배 녀석이 평소에 그리 친하지도 않던 나를 불러 앉힌 것은 생각보다 일찍 나온 영장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 하는 단순한 조언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녀석은, 학교 안에 아무리 둘러보아도 흔치 않은 장기병역미필의 동병상련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사실, 영장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던 괴물 같은 불안감이 이제는 온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형은 학사장교로 들어가게 돼 있다면서요?”

사실 나도 애초에 남들처럼 대학 이 학년 쯤 마치면 입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일학년 때 늑막에 공기가 차는 ‘기흉’이라는 병에 걸리면서 핑계김에 한 해 주저앉았고, 그렇게 한 번 시기를 놓치자 절반 넘게 한 공부를 차라리 마무리하자며 졸업 때까지 버틴 것이다. 그러다가 졸업 때쯤 스스로 나이가 부담스러워 병사보다는 장교로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학사장교 모집에 응시했고, 졸업하는 해 여름에는 입대를 하기로 날을 받아놓았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원에 입학하자 마음이 또 달라졌다. 원래 학생들을 많이 뽑지 않는 특수대학원에 입학하고 보니 나는 그 해 우리 전공의 유일한 신입생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선배들은 인문사회과학 석사학위를 받으면 그나마 전공과의 연관성을 끊지 않을 수 있는 정훈장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이왕 늦은 것 대학원을 아주 마치고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것은 입대 날짜가 다가올수록 긴장하고 있던 내 입맛에 딱 맞는 이야기들이었고, 나는 입대 서너 달을 남기고 못이기는 척 학사장교 합격 취소원을 내고 말았다. 학사장교 전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생각대로 안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응시하면 선발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일이 어떻게 되려고 그랬는지, 그 다음해 겨울 외환위기가 터지고 IMF관리체제 아래서 대량실업 사태가 나면서 학사장교는 ‘남들보다 길게 하는 군생활’이 아니라 ‘또 하나의 취업방법’이 되어버렸고, 경쟁률은 그 전 해보다 몇 배 이상 올라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퇴로가 막혀버리고 나니, 제 때 대학원을 졸업하고 정훈장교 시험을 봐서 합격하리라던 진로 역시 험해졌다. 고등학교는 삼 년에, 대학교는 사 년에 졸업하는 것이 정상이듯, 나는 대학원도 네 학기면 누구나 졸업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문제를 설정해서 해결하는 방식을 익혀야 하는 대학원 공부는 전공까지 바꿔가며 진학했던 내가 네 학기만에 마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또 삼 학기 때는 아버지까지 암으로 병원에 눕게 되면서 한참 힘을 내야 할 논문작업도 주저앉아버렸고, 모든 일은 나를 ‘이십 대 후반의 늙은 졸병’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시나리오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수술후 안정을 좀 되찾으시고, 군 제대 후에 다시 어떻게 바뀌어있을지 모를 집안이나 학교 사정 속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논문작업을 하고 있던 5학기, 그 무렵이 나로서도 군대라는 말만 들어도 입술이 마르고 학사장교를 그만 둔 일이라면 아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이었던 시간이었다.

“아니야, 나 학사장교 합격 취소했어.”
“예? 왜요?”
“왜는, 대학원 1학기만 마치고 입대를 해야 되는데, 그냥 공부 마치고 싶어서 그랬지.”
“그러면 다시 들어가려면 다시 시험을 봐야 돼요?”
“그렇겠지 뭐.”
“우와, 요즘 IMF 때문에 그것도 경쟁이 만만치 않다던데.”
“알아.”
“형, 그럼 어떡해? 형 그냥 병사로 가는거야? 형 나이 올해 몇이지? 스물 일곱인가?”
“야, 어쨌든 연기할 거면 병무청에 전화 한 번 해 보고, 가려면 지금 가. 나 바빠서 먼저 좀 간다.”

남이 말로 하는 위로는 위로가 될 수 없지만, 남의 더 큰 불행은 위로가 된다던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한참 구겨져있던 그 녀석의 얼굴은 어느 새 환해져있었고, 나는 멀쩡했던 가슴 속에 한기를 느끼면서 자리를 털었다. ‘형 큰일 났네’ 어쩌고 하는 소리 두 마디만 더 들었다가는 사람 괴팍하다는 소문 낼 일 만들 것 같았다.

흔히 미필자들은 병무청에서 걸려오는 전화 한 통에도 심각하게 흔들리곤 한다. 그리고 다른 미필자의 존재를 흔히 위로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또 적지 않은 경우 그들로 인해 일깨워지는 병역 스트레스로 하루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3.

결국 나는 스물 일곱 되던 해 봄이 되어서야 군문에 발을 들여놓았었다. 대개 대학 일이학년을 마치고 들어가는 군대를, 나는 대학과 대학원을 모두 졸업하고서도 반년 가까이 공백을 건넌 뒤에야, 그래서 동년배들이 제대는 물론이고 동원예비군 훈련마저 흔히 끝내던 무렵에 들어간 것이다.

미필자생활이란 모든 것이 유보되고 불투명한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대학생활의 절반을 넘어선 사람이라면 마땅히 구체적이어야 할 사회진출 계획도 완전에 가까운 불투명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혼이라든가 하는 인간관계의 문제 또한 무기한 유보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자친구라도 있는 상황이라면 사랑이라 믿어왔던 막연한 감정이, 현실적인 사회의 논리 앞에 얼마나 무기력하고도 막연한 모양으로 무너지는가를 목격하게 되는 시점이 흔히 미필자 시절이 된다.

미필자 생활이란 그런 것이었기에, 대개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에 견주곤 하는 군입대의 그 순간이 또 나에게는 일면 후련하기까지 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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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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